체인지킹의 후예 -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영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 소설을 읽을 때면 사전을 옆에 놓고 읽어야 될 때가 종종 있다.  물론 종이 사전은 아니고 인터넷으로 단어 검색을 한다. 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된 소설을 읽는데 도대체 모르는 단어가 그리도 많다면 그건 내가 교양이 떨어지는 이유도 크겠지만 작가가 부러 어려운 말을 집어넣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김소진이나 이문구 식의 구수한, 그러나 잊혀져가는 사투리나 아름다운 말을 문맥상 필요해서 중간중간에 끼워넣는다면 참을 수 있다. 오히려 그런 아름다운 단어를 새롭게 알게 되는 기쁨이 되기도 하니까. 그러나 현대물이면서, 문맥상 꼭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어려운 말, 잘 쓰지 않는 말을 남발하는 소설을 읽게 되면 짜증이 난다. 몇 개 정도만 있으면 그래, 너 똑똑하구나..하고 말텐데 저기저기 허방다리처럼 박혀있으면 그야말로 책을 읽기가 싫어진다.

 

쉬운 단어로도, 그러니까 외국인이 우리나라 말을 배워서 소설을 쓴다고 쳤을 때도, 얼마든지 훌륭한 소설은 나올 수 있다. 아고타 크리스토퍼가 <존재에 세 가지 거짓말>에서 이미 증명을 해주었다. 이영훈은 한국 작가이지만 아고타 크리스토퍼와 같은 느낌이다. 명색이 작가인 그가 어려운 단어를 모르진 않을진대, 그렇다고 부러 쉬운 단어만을 찾아 쓰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한 문장 속에서조차 홀리게 만드는 김훈의 미문(美文)과는 사뭇 다른 평범함 속의 아름다움을 문장으로 만들었다.

 

 

 

따뜻한 어느 여름날 밤, 병원 옥상에서 보험회사 직원 영호는 고객으로 만난 암환자 채연에게 청혼을 받는다. 자궁암이 걸린 주제에, 결혼도 했었던 주제에, 중학생 아이도 있으며 나이 마저 영호보다 8살이나 많은 주제에, 채연은 당당하게 영호에게 청혼을 한다. 당장 미래가 어떻게 될 지도 몰라 하던 일도 접고 신변 정리까지 해놓고 병원에 입원해 놓고서 말이다.

 

영호는 대답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상사로부터 무슨 명령을 받은 사람처럼 영호는 대답한다. 배 속에서 따뜻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은 저 말 말고는 다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머리를 밀어버려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채연의 머리통에 바람이 산들, 부는 걸 눈으로 좇으면서.

 

 

 

영호가 채연에게 빠진 건 채연의  당당함 때문이었을까. 전국민의 상당수가 병력(病歷)으로 암을 가지고 있는 현대에서, 가족이나 친인척까지 따지고 들어가면 암과 연결이 안 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시대에서, 아직도 암은 사람들에게 '무서움'의 대표주자이다. 그런데 여기 이 여자, 아주 당당하다. 자신이 암이 걸렸다는 걸 알자 보험회사에 직접 찾아가서 상황을 알린다. 처음 알았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아마 눈이 빨개져서 한동안을 울었을 것이다. 얼마든지 전화로 말을 해도 되었다. 자신은 그러니까, 일종의 '피해자'인 것이다. 가해자가 없다고 피해자가 없는 건 아니다. 주위의 건강한 사람들 속에 자신만이 아프고 병들어 있다면 그것만으로 피해의식은 충분하니까. 혼란과 슬픔과 억울함, 이런 낯선 감정들이 채연을 훓고 지나간 뒤 채연은 말간 눈으로 세상을 정면으로 대한다. 입원하기 전 미장원에 가서 참담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아 수더분한 머리를 맡기는 대신, 머리가 한 올 한 올 빠지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밀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대신, 자신의 선택으로 스스로 머리를 밀었다. 그리고 민머리가 되어서 햇볕이 따가운 여름날 낮에 거리를 걸어서 보험회사에 들른다. 그리고 채연과 영호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 부분은 소설의 도입 부분이다. 고작 15장에 불과하다. 심사평을 맡았던 김영하의 말처럼 내가 감동받은 앞부분은 맥거핀에 불과할 수 있다. 이후 전개되는 내용은 특촬물(특수촬영물)과 보험사기를 양 축으로 해서 박진감있게 전개된다. 특촬물과 보험사기라는 내용을 끌어내기 위해 앞부분을 도입했다면 맥거핀이 맞을 수 있겠다. 그러나 만약 앞부분이 메인이라면, 특촬물과 보험사기 이외에 다른 어떤 부분이 와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영훈에게는 충분히 그런 능력이 있어 보이며 그는 앞부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건 이 부분이다. 그가 단어를 얼마나 고심하며 이 부분을 썼을지, 아니면 아주 당연히 이 부분을 썼을지 모르겠다. 고심을 했다면 이 단어가 가장 합당했기 때문이며, 직관으로 썼다면 이 단어 외의 다른 단어는 생각할 가치조차 없었기 때문이겠다.

 

여름밤은 따뜻하다. 빛은 희미하고, 공기는 느릿하다.

 

청혼을 받은 영호가 그순간  자연에게서 언은 느낌이다. 밤이니 빛은 희미했겠지만 청혼을 받은 순간은 특히 더 그러했겠다. 채연 이외의 주변이 제대로 보이기나 했겠나. 게다가 공기는 느릿하다. 여름밤 공기는 후텁하기도 하고 습기에 절어있기도 할텐데 저순간 공기는 느릿하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하는 영호와 달리 주변의 상황은 느리게 돌아간다. 어쩜, 영원 같기도 했을 그 순간. 그 순간의 공기는 느릿해서 꿈인듯 생시인듯 느껴지며, 대답을 기다리는 채연의 드러나지 않는 애타는 마음도 느껴지며, 둘의 사람의 미래를 살짝 드러내준다.

 

이영훈이 채연에게 부여한 당당함이 보기 좋다. 채연의 당당함이 영호에게 전달되고, 아들인 샘에게 전달되는 걸 보는 것도 좋다. 무엇보다, 암 걸린 사람을 환자로 보지 않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그리지 않고, 사랑도 할 수 있고, 자식 걱정도 할 수 있고, 숨을 쉬고 있는 하나의 인격체로 그려줘서 참 좋았다. 이영훈이 다작(多作)을 했으면 좋겠다. 이영훈이 오래도록 작품을 냈으면 좋겠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3-01-04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이영훈의 짧은 단편은 별로였는데 장편은 좋나보군요.
여름밤은 따뜻하다. 빛은 희미하고, 공기는 느릿하다...
겨울밤은 차갑다. 빛은 짙고, 공기는 날카롭다....
아 뭐래 ㅋㅋ 그나저나 달사르님 오랜만이에요! 저 보는 거 오랜만이시죠?

달사르 2013-01-06 22:07   좋아요 0 | URL
장편작가와 단편작가는 아무래도 좀 표가 나는 듯해요. 호흡에서 차이가 나니까요. 둘다 잘하기는 힘이 들테니까요. 저는 이영훈의 이번 작품이 처음이에요. 단편도 찾아서 읽어볼 생각입니닷.

ㅎㅎ 맞아요. 오랜만! 소이진님 잘 지내셨지요? 이제 한 학년 올라갔겠네요. ^^

poptrash 2013-01-04 0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어요. 무척 재미있게.
저도 "여름밤은 따뜻하다. 빛은 희미하고, 공기는 느릿하다."라는 문장에서 잠깐 읽기를 멈췄어요.
별다른 문장은 아닌데, 정말 별다른 문장은 아닌데 이상하게 시선을 끌더라고요,

달사르 2013-01-06 22:10   좋아요 0 | URL
맞지여? 별다른 문장이 아닌데 자꾸 시선을 끌어서 이게 대체 뭔가..하면서 몇 번이나 봤다니까요.
저기 저 문장에서 공기는 느리다..를 넣어서 읽어봤더니 영~ 이더라구요.
느리다와 느릿하다의 차이점을 이 소설 읽으면서 알았다니까요. ㅎ

팝님도 이 소설 읽으셨다니 이제 우리의 겹침은 오에 겐자부로 외 이영훈도 포함이 되는군요? ^^

다락방 2013-01-04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이 책 읽어야겠다고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있었는데, 달사르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달사르님 이제는 자주 오실건가요? 이렇게 자주 리뷰 써주실거에요? 어쨌든 저도 이 책을 읽어볼게요.

달사르 2013-01-06 22:14   좋아요 0 | URL
넵!! 올해는 자주자주 들를께요. 게으른 달사르는 저리 가라. 훠어이~~

다락방님에게 이 소설이 어떤 느낌을 안겨줄지 궁금합니다. 저는 무척 따뜻하게 읽었거든요.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소설에서 중시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어요. 바로 따뜻한 시선. 이게 있는 사람의 글을 제가 좋아한다는 걸 말이죠.

프레이야 2013-01-05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유~~ 담아갑니다.
달사르님, 전 이영훈은 처음이에요^^
근데 확 끌리네요.

달사르 2013-01-06 22:2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도 처음이에요. 프레이야님의 녹음 목록에 이영훈 소설도 들어가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란 생각이 들긴 했어요.

조작된 마음과 진실된 마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구분하게 된다..이런 느낌이 책 읽으면서 자꾸 들었어요. 도대체 책의 어느 부분이냐고 콕 찝어달라면 말은 못해주지만요. 저는 이영훈이 후자쪽, 진실된 마음으로 쓴 글의 느낌이 났구요. 좋은 독서 시간이 되길 바래요.

탄하 2013-01-06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이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달사르님 글 스타일.
깊이 빨려들면서 넓게 번지는 느낌.
다작하시길 바라는 작가라니, 저도 궁금해집니다.
피유, <개그맨>의 김성중도 관심가는 신인작가인데 한 사람이 더 늘었네요.
어디 이들뿐이겠어요.^^

달사르 2013-01-06 22:35   좋아요 0 | URL
앗. 이런 스타일 좋아하세요? ^^

깊이 빨려들면서 넓게 번지는 느낌이라..제가 개인적으로 '번지다'란 서술어를 좋아하는데요. 물감이 번지듯 사람 간에 서로 번지는 그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타나는 걸까..에 관심도 많구요. 그래서.. 분홍신님의 칭찬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마구마구 받는 저니까, 입을 좌우로 길게 찢으며 기뻐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

김성중..은 이름을 들어본 작가에요. 저도 한 편 정도는 읽어본 듯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