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내가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자세가 삶에는 종종 도움이 된다. 힘든 시기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고 지나쳐보면 그 힘든 시기에 반짝이는 보석이 숨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다. 이제는 멀리 지나가버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이십대도 마찬가지. 빨리 늙고 싶은 게 소원이었을 만큼 힘들었던 시간은 지금의 나에게는 젊음의 열기가 그득했던 시기로 바꿔 보인다.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의 이 시기가 젊었을 적 내가 바랬던 늙은(헉!) 시기로 가는 길이니 이제는 여유를 즐길 때가 되겠다. 아직까지 덜 늙었는지 여유가 몸에 붙어 있진 않지만 그래도 다른 무언가를 부러워하는 건 많이 줄어들었다. 곰곰히 생각하면 운이 좋았던 일이 너무 많아 죽을 위기도 여럿 넘겼고 비실거리지만 사지 멀쩡해서 돌아다니고 심지어 일까지 할 수도 있으니 조금 먼 미래의 일도 꿈꾸는 게 허락되는 지금이 젤루 좋은 게 아니겠나. 어쨌든,
춥고 바빴던 겨울은 지나갔고 예년보다 빠른 여름의 시작이어서 처방전도 빠른 속도로 줄어들 줄 알았다. 바야흐로 약국의 비수기가 시작되는 듯 했는데 5월까지도 계속 바빴다. 이제 우리는 비수기가 없는 건가? 생각하면서 흐뭇해했는데 6월이 되자 거짓말처럼 한가해졌다. 이제 좀 한가해지면 책 좀 읽고 글 좀 써보자, 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던 터라 출퇴근 길에 책을 끼고 다녔지만 갑자기 한가해진 분위기에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심심해진 나는 작년과 올해를 비교해보고, 제작년과 올해를 비교해본다. 한가해졌다고 느껴지는 올해가 예년보다는 더 바쁘다는 걸 자료로 확인을 마쳤다. 그럼에도 마음은 영 어색하다. 갑자기 도래한 이 한가함을 즐겨야되는데, 남의 옷을 걸친 것 마냥 적응이 되지 않는다.
오늘도 그랬다. 인근의 소아과는 늘 미어터졌고 여름에도 어느 정도 수위를 유지했는데 오늘은 오전부터 터무니없이 조용하다. 점심 때는 정수기 필터 교환하러 사람이 왔다. 보통은 평일 점심 때 오면 귀찮은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어차피 조용하니 점심 때 와서 일을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점심을 맛있게 먹었고 오후에도 계속 조용했다. 간간이 정형외과, 내과, 치과 사람들만 들락거렸고 우리의 메인인 소아과에선 처방전이 몇 건만 왔다. 여름이라 오전에 병원 다녀가고 오후에는 안 다니나보다, 유모차 끌고 다니려면 오후 뙤약볕이 얼마나 덥겠냐,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후 4시 30분. 정수기 필터를 교환한 지 4시간이 지난 후다. 목이 마르다. 점심 전에 알라딘 물통에 떠놓은 물을 먹어보니 미지근하다. 물을 약국 밖에 버리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앗, 물 맛이...물에서 술맛이 났다. 에튀튀..뭐야, 물맛이 왜이래? 내 입맛이 이상한가? 더워서 입맛이 가버렸나? 직원이 한마디 한다. 자기가 아까 먹었을 때도 그랬단다. 원래 정수기 필터 갈면 물맛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물어본다. 음..그런가..
그렇지만 여직 필터를 교환하면서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뭔가 이상해서 전화를 넣었다. 말이 어눌한 정수기직원이 받았고 곧 온다는 말을 들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필터교환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라고 직원이 의문을 제기한다. 총 4개의 필터를 교환하는데 두 달마다 2개씩을 번갈아가며 교환한다. 생각해보니 정수기 물이 들어가서 사용되는 커피 자판기도 문제가 있겠다. 에이포지에 커피 금지, 물 금지 라고 큼지막하게 써서 붙여놨다. 40분이 흘렀다. 정수기직원이 오질 않는다. 전화를 다시 넣었다. 곧 온다고 한다. 정수기직원이 오면 화를 좀 내볼까? 그냥 지켜만 볼까? 둘이서 의논을 하던 중 가게 앞에 누군가 오토바이를 세운다. 정수기사장님이다.
사장님은 오자마자 술맛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정수기 뚜껑을 열고 아무 말 없이 정수기를 들어서 가게 밖에 내놓는다. 그리고는 필터를 다른 걸로 바꾼다. 갸웃? 필터 순서 바뀐게 아니고 필터를 엉뚱한 걸 꽂은 거에요? 헉..기존의 필터와 다른 새로운 종류의 필터를 이번에 내렸는데 이 필터에는 방부제인지 뭔지가 들어있어서 물로 한참을 씻어내린 후에 꽂아야 하는 종류란다. 필터회사에서 필터를 내리는 과정에 사용설명서에 대한 숙지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필터교환을 한 것이다. 갑자기 식은 땀이 났다. 우리는 이 물로 아이들 시럽을 만드는데 만약 방부제가 든 물로 시럽을 만들었다면..조금 먹은 우리도 속이 미식거리고 니글거리고 영 불편한데, 아이가 이걸 먹었다고 생각하니 눈 앞이 핑 돈다. 얼른 오후 처방전을 찾아봐야지. 아찔하다.
헤매고 있는데 처방전이 한 장 온다. 좀 떨어진 병원의 가정의학과 처방전이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도중에 인근의 소아과가 오후에 진료를 보지 않았기에 좀 떨어진 병원으로 갔다는 말을 하신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에 소아과 처방전이..왔는데...? 아..오전에 진료 보고 오후에 다녀가신 사람들이로구나. 급히 직원에게 물어본다. 오후에 약 만드는 물통에 물 받은 적 있어요? 없단다. 그래도 확인을 위해서 한모금 물을 마셔본다. 술맛 같은 이상한 맛이 나지 않는다.
이런 다행스러운 일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지는 않았지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나는 어째 한가해지는 타임도 이렇게 잘 맞추는지. 정말로 복이 있는 사람인가부다.
소아과 과장샘의 오후 휴진이 이렇게 뛸 듯이 기쁜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 ")
내일부터는 한가한 타임을 좀더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