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조카들의 개학날이다. 초딩 6학년인 작은 조카는 방학 숙제인 일기를 어제에서야 겨우 마쳤다. 매일 쓰는 일기를 몰아서 쓰는 버릇은 (게으른) 이모를 닮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디테일까지 세심하게 복원하는 기술은 (전혀!) 닮지 않았는지 조카는 일기숙제를 아주 힘겨워했다. 괴로워하는 조카를 위해 내가 옆에서 거들어준다.
"그거 쓰면 되잖아. 이번 명절에 열심히 이모 약국 봐준 거 써. 가령, 이렇게 말이지."
"설날 전날에 이모 약국을 봐주었습니다. 명절엔 같이 계시는 이모가 없기에 내가 이모를 도와줘야 됩니다. 나는 손님이 오면 일단 인사를 크게 합니다. 그리고 처방전을 받고 입력을 합니다. 입력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시럽 등이 나올 경우는 용량 단위가 있기에 잘 확인하고 입력해야 합니다. 이모가 약을 짓고 나오시면 내가 옆에서 계산을 거듭니다. 나는 산수를 잘 하기에 계산을 실수하지 않습니다. 이제 약을 받으신 손님이 나가십니다. 나는 큰소리로 안녕히 가세요, 라고 인사를 합니다. 내 인사에 오고가는 손님들이 크게 기뻐하며 웃으시는 모습에 나도 왠지 뿌듯합니다. 명절에 이모 일을 거드는 일은 특히나 보람찬 일인 듯합니다."
그때 일이 떠오르는지 작은 조카가 흥분했다.
"맞아요. 맞아. 제가 인사를 크게 하니 사람들이 참 많이 좋아했어요. 전산 입력은 아주 간단한 건데 신기하게 쳐다들 봤구요. 그리고 계산을 제가 척척! 하니까 또 기특하다,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했어요. 하하하"
"그럼그럼. 명절에 이모가 너 도움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뭐, 일단 이렇게 하나 정도 쓰면 되겠고, 음..또, 그래..할아버지에게 매일 용돈 받는 것도 쓰면 되겠네. 게다가 요새는 이모에게도 받으니 그것도 같이 쓰면 되지. 이렇게 말야."
"평일에 나는 하루에 한 번은 꼭 이모네 가게와 할아버지네 가게에 들릅니다. 이모네 가게와 할아버지네 가게는 가까이 있습니다. 급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나는 가급적이면 가게들에 들르려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제가 가면 두 분이 저에게 용돈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부모님이 따로 용돈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할아버지가 용돈을 주십니다. 할아버지에게 용돈을 받는 일은 부끄럽고 쑥스럽지만 매일 용돈을 받으러 들락거리다보니 할아버지가 무척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얼마전에는 이모도 합세를 했습니다. 용돈을 받을 때는 구십 도 인사가 절로 나옵니다. 받은 용돈으로 조금 있다가 맛있는 과자를 사 먹을 생각을 하면 구십도 인사가 가능합니다."
이번에는 옆에서 듣고 있던 큰조카가 거든다.
"맞아요. 맞아. 구십도 인사가 절로 나와요. ㅋㄷㅋㄷ"
"그래. 너도 부끄러움 많은 성격 이번에 많이 고쳤잖아. 가족끼리도 더 자주 만나면 더 친해지거든. 오고가는 현금 속에 싹 트는 가족애, 랄까."
"그 다음엔..부산에 사촌 형 왔던 이야기도 하나 쓰고."
"이번 설날에도 사촌 형과 여동생이 왔습니다. 사촌 형은 성악을 전공합니다. 노래를 아주 잘 합니다. 사촌 형은 아주 장난꾸러기입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우리 누나에게 깐죽거립니다. 누나는 이번 방학 때 미장원에서 롤스트레이트를 했습니다. 사촌 형은 명절 당일 하루 종일 약국을 보고 돌아 온 누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밤송이, 밤송이, 노래를 합니다. 웃으면서 식탁에 앉아 약국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이야기 중이던 누나 얼굴이 갑자기 새파래지더니 식탁에서 일어납니다. 누나가 삐져서 방에 들어갔습니다. 엄마가 사촌 형에게 말조심을 좀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조그맣게 사촌 형 따라 밤송이, 따라 말했던 걸 엄마가 들었나봅니다. 나에게도 꾸중을 합니다. 왁자하던 거실이 조용해졌습니다. 부산 이모가 사촌 형에게 자꾸 노래를 불러보라 시킵니다. 뻘줌한 분위기에 노래가 들어가면 좋아지니까요. 아마, 형아 노래 잘 하는 거 자랑시키려는 목적도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요. 엄마가 나에게 기타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기타는 나보다 누나가 더 잘 치는데..아..부끄럽습니다. 기타를 가져와서 딩가딩가 연주를 하니, 누나가 방에서 나옵니다. 화가 풀렸나 봅니다. 누나에게 기타를 건넸습니다. 누나가 기타를 연주합니다. 그런데 또 사촌 형이 누나에게 뭐라고 뭐라고 합니다. 아, 이번에는 누나가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막 눈물을 비칩니다. 또 방에 들어갑니다. 다시 주위 눈치를 살핍니다. 엄마와 이모 들이 방에 들어가서 누나를 다독입니다. 다들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못 들었기에 의아해하고만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살 좀 빼라, 뭐 이런 말을 했나 봅니다. 사촌 형은 사촌에게 어울리는 좋은 말을 하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나도 덩달아 엄마에게 많이 혼났습니다. 중학생 사춘기 누나는 예민하기에 함부로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된다는 걸 사촌 형이 몰랐나 봅니다. 나는 아는데 말이죠."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또 그때 일이 다들 생각나서 한 마디씩 합니다.
"이런 거 좀 쓰란 말이야. 왜 너에게 일어난 일을 이모가 너보다 더 자세히 기억하냔 말이지. 또 줄줄 읊어줘? 기타 학원 다니는 거랑, 태권도 가서 친구들이랑 신나게 노는 거, 대련한 거, 이런 거 쓸 거 많잖아. 그냥 주욱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되지. 이모가 니 일기를 써도 지금 백 일이는 앉은 자리에서 쓰겠다야. 아무래도 너는 부산 큰이모를 닮았나부다. 일기쓰기가 그렇게 괴로우니 말야. 부산 이모도 어릴 때 일기 쓰기가 고역이라면서 매번 내 일기를 베껴서 냈거든. 그래놓고는 큰 상도 받았는데 말이지. 아주 뿌듯해하더라. 하하하."
"맞아요. 맞아. 수학 문제 풀기는 식은 죽 먹기인데 일기 쓰기는 너무 고역이에요. 제일 힘든 게 일기쓰기에요. 그래서 말인데요. 다시 하나하나 불러주시면 안되요. 제가 받아적을게요."
ㅠ.ㅠ
그 쉬운 일기쓰기를 힘들어하는 조카를 보면서 갑자기 여기가 생각났다. 나도 혹시 글을 쓰다말다 하면 작은조카처럼 글쓰기가 힘들어지게 될까? 그럼 안되는데.. 조금만 더 있으면 바쁜 시간이 지나가는데 정작 여유로운 시간이 와도 글쓰기가 안되는 건 아닐까? 사실 그동안 읽은 책도 얼마 안 된다. 그나마도 리뷰는 하나도 안 올렸구..친구가 김연수 신간을 갖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이렇게 말을 했다. "어, 김연수가 신간 냈어요? 책 제목이 뭐던가요?" ㅠ.ㅠ
친구가 책제목을 알려주지 않아서 알라딘에 들어왔다. 알라딘 서재에 들어오니 책제목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책 나오기 전부터 인기 짱인 김연수 신간. 훗, 나도 읽어주겠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