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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아도 되는 건지 싶을 정도로 읽을 책들이 많아서 조금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읽어야 할 책들도 있고, 읽고 싶은 책들도 있죠. 그 와중에 사고 싶은 책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아주 바쁩니다. 날씨는  또 어떻고요. 당장 책 들고 나오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오에 겐자부로가 "소설 쓰기가 끝났다"고 한 것을 보고 그에게 호기심을 느낀 사람이 저만은 아닐겁니다.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 이야기도 알고 있었고, 그의 글도 오며 가며 읽었지만 최근 작가의 행보만큼 호기심 가지는 않습니다.

이제, 오에 겐자부로를 읽을 차례인가 봅니다.

 

 

 

 

 

 

 

 

 

20세기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한 시기입니다. 그 시기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이 책도 그런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읽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류전윈 아시나요? 류전윈.

<닭털 같은 나날>을 읽고는 이거 진짜 재밌다! 하고 이 작가의 책을 몇 권 더 샀더랬죠. 그리고 중국소설에 본격적으로 관심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만난 옌렌커, 모옌, 위화 등은 이제 아주 소중한 목록이 되었어요. 그러니 이 책은 꼭 읽어야겠죠!

 

 

 

 

 

 

 

 

 

이 작가도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 보여준 그 처연한 느낌이 책 읽은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태 남아 있어요. <나를 보내지 마>와 닿아 있는 것 같아서 더 기대됩니다. 이 소설.

 

 

 

 

 

 

 

 

 

 

 

사실 <순이 삼촌>은 읽었지만, 우리 아픈 근현대사를 깊이 있게 다뤘다는 점에서 현기영 작가의 작품은 무척 소중합니다. 단편들이 깔끔하게 묶여 새로 나왔다니 당연히 읽어봐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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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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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이 사람들이 한 권의 책에 다 이름을 올린단 말입니까.

거의 친숙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솔제니친부터 첫 문장을 자꾸 읊고 싶게 만드는 그 소설 <롤리타>를 지은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물론이고 나딘 고디머나 조지 소로스까지 이 대단한 스펙트럼의 인물들이 등장해야 했던 이유가 이 사람, '리모노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100% 납득되지는 않습니다만...

500쪽이 넘는 두툼한 이야기로 이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쫓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요. 유독 이 책이 읽기 힘들었던 이유는 '대체 이 사람은 뭐냐...' 하는 생각이 자꾸 발목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목차에서부터 그렇죠. 우크라이나 → 모스크바 → 뉴욕 → 파리 → (다시)모스크바 → 하리코프 → 부코바르 → 사라예보 → (또)모스크바 → (다시)파리 → 크라이나세르비아공화국(이름 깁니다;;) → (또다시)모스크바 → 알타이 → 레포르토보 → 사라토프 → 엥겔스(이 무시무시한 곳들) → (마침내)모스크바 로 이어지는 이 다채로운 궤적이라니요.

 

하찮은 조연이 되기를 극도로 거부했던 사람, 질투심으로 자신을 성장시킨 사람, 프롤레타리아의 정체성을 늘 염두에 두었던 사람(굳건히 지킨 사람, 이라고 적었다 지운다), 리모노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보노라면 그저 세상은 넓고, 사람은 제각각이다, 라는 생각만 맴도는 것입니다.

 

도무지 어려운 이름들과 낯선 풍경에서 헤매던 저는 책을 포기할 수 없어 '러시아 근현대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어보자 다짐했지요. 그러니 좀 읽혔습니다. 국가 폭력과 독재, 반독재 시위나 지하 조직의 이야기, 또는 가난한 민중들의 삶과 유리된 정책들은 만국 공통이로구나 생각도 했고요.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책, 『리모노프』는 너무했습니다.

 

자신들의 아버지뻘, 아주 어린 처년들한테는 할아버지뻘이 되는 남자, 스무 살에는 누구나 한 번씩 꿈꾸는 모험적인 삶을 살아온 리모노프, 그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리고 이 전설의 요체, 청년들 모두에게 리모노프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가 수감 생활에서 보여 준 쿨한 영웅주의다. (35쪽)

이렇게 호감 가는 인물로 주인공을 소개해놓고는 막상 열어보니

 

뭐, 암으로 죽으라 그래, 그 꼬맹이, 엿 먹어! 그래, 잘생겼어, 그래, 불쌍해, 그래도 난 마찬가지야, 엿 먹어! 차라리 잘됐어. 죽어라, 부자 애비를 둔 녀석아, 난 덩실덩실 춤을 출 거다. 진지하고 개성적인 내 인생이 하나같이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한테 짓밟히는 이 마당에, 내가 왜 연민과 동정을 가장해야 하냐고? (220쪽)

이런 생각이나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가감없이 보여주었으니까요.

리모노프의 초특급울트라슈퍼대서사시에는 많은 젊은 러시아인들이 추종하는 영웅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의 과격함과 이중잣대는 그야말로 '단 하나의 규칙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명제로 수렴되기 때문이죠.

 

물론 누군가를 미화시키지 않고, 단순한 위인전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찾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살아남은 자는 누구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낭만적이거나 웅장한 결말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다양한 삶은 의미가 있겠지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토록 자신에 대한 신념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이 책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책은 자체로 의미가 있어요. 한 인간이 (스스로 믿는)시대적 사명을 따라 가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모습은 범인의 눈에는 그저 낯설고 불편하긴 하지만요. 어쩌면 모든 영웅이 이렇게 태어나고, 혹은 사라지고, 좌절하고, 이야기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런 미시적인 부분을 감수한다면, 그렇다면 리모노프는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만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살아온 데에는 그 자신의 기질뿐 아니라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자본주의로 사회가 개편되면서 겪어야 했던 동포(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지 고민이 됩니다만)들에 대한 연민과 소명의식도 분명 큰 역할을 했잖아요. 그는 서방세계에서 충분히 편안한 삶에 편입되어 살 기회가 있었지만 거부했죠. 민족볼셰비키당이라는 당을 창당하고, 청년들을 조직하고, 총을 들기도 한 데에는 그 나름의 애국심이 분연히 발현되었던 것이죠.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리모노프의 이야기는 끝까지 아찔합니다.

세상이 이토록 작은 어긋남으로 직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아찔함을 거둘 수가 없어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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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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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밑이 자꾸 들썩입니다. 규칙적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미세한 들썩임이 신경을 갉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철분 부족 증상'이라고 간명하게 진단해버리고 말지만 쇠를 한 움큼 먹는다 해도 이 들썩임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습니다. 며칠째 계속된 들썩임은 이제 그 자체로 내가 된 듯합니다. 불안을 야기하는 예측 불가능의 불청객에 지배당합니다. 하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원래 나였던 듯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흑은 백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백은 흑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는 내내 불안했습니다. 도저히 섞어들 수 없는 둘, 색의 대비만큼이나 선명한 둘의 태도가 '선셋 리미티드'의 철로처럼 끝까지 만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는 모습이 말이지요. 선이 만난다면 기차는 달리지 못할 테고, 계속 평행을 유지한다면 이 불안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눈 밑이 들썩여 불안이 더욱 커졌는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어째서 흑은 백을 놓아주지 못하고, 백은 흑에게 설득당하지 않는 겁니까. 왜 끝까지 둘은 닿는 듯 닿지 못하고. 서로를 발견하나 이해하진 못하고 흩어지는 말들을 늘어놓는 건지.

 

흑인 목사는 살인자, 전과범이자 마약과 알콜 문제를 가진 지인을 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고 지옥에서 천국을 설파하겠다는 사명의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에게 나타난 백인 교수는 어떤 이유에선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어요. 흑인 목사는 그를 구해내 자신의 장소로 데려옵니다. 백은 자살을 하려고 했던 자. 처음에는 균형추가 흑으로 기울어있는 듯합니다. 다즌즈 게임("형제들 둘이 서서 서로 욕을 하다가 먼저 열받는 쪽이 지는 거지" -71쪽)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흑은 그러나 백보다 먼저 승기를 잡은 듯해요. '골탕 구렁텅이'에 백을 빠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은 어째서 자살하려고 했나, 여기에 첫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아주 약했어요. 아주 부서지기 쉬웠지요. 나는 그걸 몰랐습니다. 절대 파괴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한데 그렇지가 않더군요. -27쪽

세상은 구역질 나는 것 투성이입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안에서 작은 신호를 발견하거나 발견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흑인 목사가 자신의 삶을 그런대로 긍정하고 지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허름한 외면 안에는 나름의 신념과 자부심이 있어요. 우리는 대체로 그렇습니다. 지옥인지 모를 곳에서 천국의 그림자를 봐요. 그러니 흑은 백의 자살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어째서 자살을 하려 했는가. 그 의도의 가장 밑바닥을 드러내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면 생각을 고쳐먹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백 역시 흑의 요구를 거부하는가 하면 일정부분 내놓기도 하는데, 그게 또 심상찮습니다.

백은 영리한 사람이니까요.

 

두 번째 질문, 흑은 백을 교화할 수 있는가.

이들의 대화는 치열한 게임 같습니다. 서로의 말을 되묻고 자신의 말을 숨기죠. 이들은 중요한 것을 대충 말하거나 사소한 것을 치밀하게 말하죠. 여기서 독자는 혼란을 느낍니다. 어째서 이 모든 대화가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이 제 멋대로인 듯한 계산된 의도대로 흘러가는가. 특히 저는 결국 흑인 목사에 동화되어, 조금씩 빗장을 여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백인 교수에 대해 막연한 희망을 감지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긴 마라톤은 끝났다, 드디어 끝이 보인다, 고 말이지요.

 

하지만 끝내 흑은 이 게임에서 진 것 같습니다. 백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렇게 느꼈습니다)놀리듯이 자신의 고집을 내뱉고는 떠납니다. 다즌즈 게임의 규칙으로 보자면 백이 진 것이겠지만 좌절하는 것은 흑이니 흑이 진 것이 맞겠지요.

그렇습니다. 흑은 좌절합니다. 백을 만나게 하고, 얘기를 듣게 하고, 끝내 그대로 떠나가게 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당신이 왜 나를 거기 내려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해를 못하겠어요. 내가 저 사람을 돕기를 원하셨다면 왜 나한테 할말을 주시지 않은 겁니까? 저 사람한테는 할말을 주셔놓고.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138쪽

 

자살하려고 한 자와 그를 구한 자, 세상을 믿지 않는 자와 신을 대변하려는 자. 이 단순한 소설적 상황에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겠지요. 다만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어 짐작하자면, 신과 세상에 대한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여보려 한 것은 아닐까요? 어떤 이에게는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가 스스로를 져버리려 할 때조차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 신. 가장 밑바닥에서 희망을 보는 사람과 많은 것을 이루고도 좌절 속에 사는 사람. 범인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게 그런 신과 세상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각자는 제각기 다른 모습의 신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의 세상은 좌절도 희망도 같은 듯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가까스로 더듬어 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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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창비세계문학 40
마리오 베네데티 지음, 김현균 옮김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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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내게 암울한 운명을 주신 건 분명하다. 잔혹하진 않다. 단지 암울할 뿐. 하느님이 내게 휴전을 허락하셨다는 건 분명하다. 처음엔 이러한 휴전이 행복이라면 믿지 않으려 했다.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국 굴복했고 그렇게 믿게 되었다. 그러나 단지 휴전이었을 뿐, 행복은 아니었다. 이제 또다시 나의 운명에 휘말렸다. 전보다 더 암울하다. 훨씬 더. (219쪽) 

주인공 마르띤. 그는 삶이라는 전쟁에서 일찌감치 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랑과 섹스를 탐미했던 젊은 날, 아내 이사벨을 잃고 그는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 그저 묵묵히 삶을 살아왔습니다. 세 아이를 홀로 키웠고, 퇴직을 앞둔 시점까지 성실하게 직장에 다녔으며, 부족하지 않을 만큼 벌었고, 간절히 퇴직을 기다리며 휴식하는 순간에 대해 꼼꼼하게 생각합니다. 패전이랄까요. 전쟁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잘 알았던 그는 규칙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한 줌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다듬습니다. 예민하고 섬세하게 말이지요. 그것은 분명한 패자의 태도이며, 완벽한 항복의 의사표시입니다. 


하나 고백하자면, 난 대문자 M이나 소문자 b 같은 몇몇 글자의 생김새를 보면 기분이 좋다. 그래서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해본 적도 있다. 내 업무에서 그나마 덜 싫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일의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성격이다. (11쪽) 

그런 그가 자신에게 철저하게 냉소적이었던, 혹은 스스로 철저하게 냉소했던 신과 휴전을 맺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휴전을 허락' 받습니다. 그것이 휴전일 거라고 짐작하지만 휴전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자신은 없습니다. 긴장했고, 의심했고,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휴전은 휴전입니다. 그에게 허락된 휴전, 한 여자, 아베야네다입니다. 


아베야네다. 아베야네다는 누구인가요. 그녀는 어째서 마르띤에게 허락된 휴전인가요. 


그녀는 노장 마르띤 밑으로 들어온 신입사원입니다. 처음부터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마르띤은 서서히 그녀를 담습니다. 딸 블랑까와 비슷한 또래일지언정 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뜨거운 열기에 휩싸인 사랑이 아닙니다. 다만 예의 침착한 태도로 담담하게 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곧 온전히 서로를 이해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함께 하는 삶을 꾸립니다. 


흥미로운 것은 전형적이지 않은 관계에서 발견하는 이상적인 관계의 발전 양상입니다. 쉽게 말해, 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사랑하는 여자도, 어린 여자에게 빠진 늙은 남자도 아닌 그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자신만의 방법대로 사랑할 줄 아는 성숙한 두 자아가 보여주는 풍경 말입니다. 아름답고 편안합니다. 불타지 않아도 따뜻합니다. 주변에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가 펼쳐지고 있지만 이들만큼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빛을 발합니다. 마침내 마르띤은 아베야네다와의 결혼을 결심하지요. 


그러나 이것이, 다름 아닌 신이 허락한 휴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 

우리는 무척이나 충격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결 같던 마르띤 역시 극렬하게 혼란을 느낍니다. 잊고 있던, 혹은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았던 하나님을 되뇌이면서 말이에요. 

마르띤의 사랑은 끝나고, 신과의 짧은 휴전도 끝이 납니다. 마르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때보다 겪고 난 지금, 훨씬 더 암울합니다. 


그리고 그의 일기도 끝이 나요. 


참 서늘합니다. 

일찍이 냉소를 알아버린 삶이라는 것이. 

냉소 외에 달리 이 삶을 보듬을 다정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르띤의 일기가 끝나버렸다는 것이 말이에요. 

"이제 뭘 하지?" 하는 고민으로 삶을 부정하는 주인공(혹은 우리 모두)이라니 말이에요. 

쓸쓸하고, 쓸쓸해서 견딜 수 없어 자꾸 쓸쓸함을 어루만지는 쓸쓸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르띤의 엄청나고 비극적인 로맨스 외에도 소설은 그가 거니는 일상의 궤적을 통해 바로 그 자리의 사회를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친구 아니발과의 대화, 딸과 딸의 남자친구와 나누는 대화 등을 통해 그 자리에 사는 삶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불안과 허무를 생활 언어로 보여줘요. 이것들은 일관되고 정직하게 저들이 발 딛은 사회를 그립니다. 덕분에 그들의 삶에 온전히 빠져들게 되는 현장성을 획득하게 되죠. 


사실 예나 지금이나 뇌물은 항상 존재했고 낙하산 인사나 부정 거래 따위도 마찬가지다. 그럼 뭐가 더 나빠졌나? 머리를 쥐어짠 끝에 더 나빠진 것은 체념하는 태도라는 결론을 얻었다. 반항아들은 어정쩡한 반항아들이 되었고 어정쩡한 반항아들은 체념하게 되었다. (71쪽) 

입체적이라는 점에서 <휴전>이 주는 단단한 매력은 주인공 마르띤의 성격만큼이나 꼼꼼하고 예민하게 잔상을 남깁니다. 주인공이 살았던 풍경, 친구 혹은 자녀들과 나눈 대화 모두가 <휴전>이라는 짧은 그림을 완성합니다. 비록 그림은 고독하고, 주인공은 소외되었지만 그것이 어쩌면 모두의 삶이 아닐까요. 가끔씩 오는 '휴전'의 순간들에 비척거리게 되는 그런 삶 말이에요. 



*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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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이러니 하다. 잊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을 해야 한다는 것, 적어도 `기억하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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