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창비세계문학 40
마리오 베네데티 지음, 김현균 옮김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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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내게 암울한 운명을 주신 건 분명하다. 잔혹하진 않다. 단지 암울할 뿐. 하느님이 내게 휴전을 허락하셨다는 건 분명하다. 처음엔 이러한 휴전이 행복이라면 믿지 않으려 했다.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국 굴복했고 그렇게 믿게 되었다. 그러나 단지 휴전이었을 뿐, 행복은 아니었다. 이제 또다시 나의 운명에 휘말렸다. 전보다 더 암울하다. 훨씬 더. (219쪽) 

주인공 마르띤. 그는 삶이라는 전쟁에서 일찌감치 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랑과 섹스를 탐미했던 젊은 날, 아내 이사벨을 잃고 그는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 그저 묵묵히 삶을 살아왔습니다. 세 아이를 홀로 키웠고, 퇴직을 앞둔 시점까지 성실하게 직장에 다녔으며, 부족하지 않을 만큼 벌었고, 간절히 퇴직을 기다리며 휴식하는 순간에 대해 꼼꼼하게 생각합니다. 패전이랄까요. 전쟁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잘 알았던 그는 규칙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한 줌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다듬습니다. 예민하고 섬세하게 말이지요. 그것은 분명한 패자의 태도이며, 완벽한 항복의 의사표시입니다. 


하나 고백하자면, 난 대문자 M이나 소문자 b 같은 몇몇 글자의 생김새를 보면 기분이 좋다. 그래서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해본 적도 있다. 내 업무에서 그나마 덜 싫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일의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성격이다. (11쪽) 

그런 그가 자신에게 철저하게 냉소적이었던, 혹은 스스로 철저하게 냉소했던 신과 휴전을 맺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휴전을 허락' 받습니다. 그것이 휴전일 거라고 짐작하지만 휴전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자신은 없습니다. 긴장했고, 의심했고,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휴전은 휴전입니다. 그에게 허락된 휴전, 한 여자, 아베야네다입니다. 


아베야네다. 아베야네다는 누구인가요. 그녀는 어째서 마르띤에게 허락된 휴전인가요. 


그녀는 노장 마르띤 밑으로 들어온 신입사원입니다. 처음부터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마르띤은 서서히 그녀를 담습니다. 딸 블랑까와 비슷한 또래일지언정 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뜨거운 열기에 휩싸인 사랑이 아닙니다. 다만 예의 침착한 태도로 담담하게 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곧 온전히 서로를 이해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함께 하는 삶을 꾸립니다. 


흥미로운 것은 전형적이지 않은 관계에서 발견하는 이상적인 관계의 발전 양상입니다. 쉽게 말해, 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사랑하는 여자도, 어린 여자에게 빠진 늙은 남자도 아닌 그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자신만의 방법대로 사랑할 줄 아는 성숙한 두 자아가 보여주는 풍경 말입니다. 아름답고 편안합니다. 불타지 않아도 따뜻합니다. 주변에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가 펼쳐지고 있지만 이들만큼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빛을 발합니다. 마침내 마르띤은 아베야네다와의 결혼을 결심하지요. 


그러나 이것이, 다름 아닌 신이 허락한 휴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 

우리는 무척이나 충격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결 같던 마르띤 역시 극렬하게 혼란을 느낍니다. 잊고 있던, 혹은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았던 하나님을 되뇌이면서 말이에요. 

마르띤의 사랑은 끝나고, 신과의 짧은 휴전도 끝이 납니다. 마르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때보다 겪고 난 지금, 훨씬 더 암울합니다. 


그리고 그의 일기도 끝이 나요. 


참 서늘합니다. 

일찍이 냉소를 알아버린 삶이라는 것이. 

냉소 외에 달리 이 삶을 보듬을 다정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르띤의 일기가 끝나버렸다는 것이 말이에요. 

"이제 뭘 하지?" 하는 고민으로 삶을 부정하는 주인공(혹은 우리 모두)이라니 말이에요. 

쓸쓸하고, 쓸쓸해서 견딜 수 없어 자꾸 쓸쓸함을 어루만지는 쓸쓸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르띤의 엄청나고 비극적인 로맨스 외에도 소설은 그가 거니는 일상의 궤적을 통해 바로 그 자리의 사회를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친구 아니발과의 대화, 딸과 딸의 남자친구와 나누는 대화 등을 통해 그 자리에 사는 삶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불안과 허무를 생활 언어로 보여줘요. 이것들은 일관되고 정직하게 저들이 발 딛은 사회를 그립니다. 덕분에 그들의 삶에 온전히 빠져들게 되는 현장성을 획득하게 되죠. 


사실 예나 지금이나 뇌물은 항상 존재했고 낙하산 인사나 부정 거래 따위도 마찬가지다. 그럼 뭐가 더 나빠졌나? 머리를 쥐어짠 끝에 더 나빠진 것은 체념하는 태도라는 결론을 얻었다. 반항아들은 어정쩡한 반항아들이 되었고 어정쩡한 반항아들은 체념하게 되었다. (71쪽) 

입체적이라는 점에서 <휴전>이 주는 단단한 매력은 주인공 마르띤의 성격만큼이나 꼼꼼하고 예민하게 잔상을 남깁니다. 주인공이 살았던 풍경, 친구 혹은 자녀들과 나눈 대화 모두가 <휴전>이라는 짧은 그림을 완성합니다. 비록 그림은 고독하고, 주인공은 소외되었지만 그것이 어쩌면 모두의 삶이 아닐까요. 가끔씩 오는 '휴전'의 순간들에 비척거리게 되는 그런 삶 말이에요. 



*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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