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사생활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15
장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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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와 삶 사이의 거리를 생각한다. 내 삶 안에 있는 취미만 알고 있었는데 내 삶의 바깥에 취미를 두고 있는 사람도 있겠다는 생각, 이 책으로 얻었다. 


소설은 비교적 가볍고 경쾌하게 시작되었다. 약간은 랄랄라 하는 기분으로 읽어 나갔다. 소설의 중간쯤 이르렀을 때 뭔가 기분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편하지 않은, 거북하고 거슬리는, 염려되고 불안한, 어쩌려고 이러나 이 인물들은... 분량이 많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책을 잡은 후 한번에 끝내기는 했는데.


다 읽고 나니 온통 걱정이다. 걱정만 남겨 준 책이다. 은협이도 은협이의 가족들도 은협이의 이웃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나'도 다 걱정이 된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려나, 나는 주제넘게 걱정을 한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내가 그 안의 일원으로 들어 있지 않다는 것만 무진장 고마워서.  


이 작가의 글 중 '나의 사내연애 이야기'를 읽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책을 읽은 지금의 기분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찾아서 막 더 읽고 싶은 마음까지 나가지는 않고 그런데 조금은 더 보고 싶기도 한 듯 오락가락하는. 이렇게 또 한국문학의 가지 하나를 얻는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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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의 과학 - 당신의 요가를 완성하는 해부학과 생리학의 원리 ㅣ DK 운동의 과학
앤 스완슨 지음, 권기호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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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그대로다. 특히 부제로 나오는 ‘당신의 요가를 완성하는 해부학과 생리학의 원리’. 요가의 효과를 의학과 과학의 연구 사례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요가 자세의 원리와 효과에 대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빌려 본 책인데 퍽 만족스럽다. 


요가 자세를 취한 그림에 여러 방향에서 설명을 덧붙여 놓고 있다. 의학과 과학의 이론과 원리를 비롯해 인체 해부학 용어들까지 줄줄이 나오는데 아주 많이 낯설다. 외워서 남들 앞에서 아는 척하면 근사해 보일 때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럴 마음은 안 든다. 무엇보다 그럴 능력이 우선 없고. 요가를 가르치는 분들에게는 본인이 습득한 양만큼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쩌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인지도 모르겠다.  


요가를 하고 있는 중이라 때때로 궁금한 점이 생길 때가 있다. 수련을 하는 중에 떠올라서 마치고 강사님께 여쭤 봐야지 했다가는 다 잊어먹고 만다. 집으로 오는 길에서야 생각이 나서 쓴웃음을 지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쩔 수 없지, 수련을 받는 동안 그저 잘 따라서 하는 수밖에. 


책은 이런 내 처지에 도움을 주는 정보들을 꽤 담고 있다. 인체의 구조와 요가 자세와의 연관성이라든가 근육의 구조와 작용 원리 등은 읽으면서 ‘그렇군’ 하는 마음이 들게 해 주었다. 이래서 이렇게 하라는 것이었군, 이 동작이 이런 근육 강화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군,... 강사가 수련 중에 해 주던 말들도 떠올랐고 요모조모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다. 


동작에 대한 원리나 효과뿐 아니라 요가라는 활동에 대한 작가의 생각들도 페이지 곳곳에 실려 있다. 특히 요가를 하면 좋은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 ‘요가는 뇌에 영향을 미친다’는 대목은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 이곳저곳에서 주워 들었던 요가의 장점들이 전문가가 정리해 놓은 내용으로 확인하게 된 듯해서 기분이 많이 산뜻하다.  


요가 자세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은 글과 그림을 보고 또 낯익은 자세들에서 얻을 수 있다는 상세한 효과를 보니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소머리자세가 한쪽은 되고 한쪽은 안 되고 있는데 이러는 이유를 알게 된 것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모조리 다 알아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다 알아듣지는 못하겠어도 당장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좋았다. (y에서 옮김20211003)


요가 수업을 듣는다

단체로 운동하고 강사에게 배우면 거울신경세포가 활성화된다. 거울신경세포 계통은 최근에 발견된 신경망으로, 운동을 모방하고 공감이 일어나는 데 관여한다. - P26

요가와 염증

요가는 스트레스 반응을 줄임으로써 질병 발생 위험을 낮추고 염증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요가 수행은 사이토카인 수치를 낮춰 염증을 완화한다는 연구가 있다. 과학자들은 장기간의 규칙적인 요가 수행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추정한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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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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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좋다고 평가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왜 이 책을 쓴 사람을 존경하게 되었는가? 글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 것인가? 나는 왜 가끔 내가 낯선가?


작가는 이 책을 펴내고 난 뒤 지난 8월 8일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다시는 이분이 쓴 글을 새로 읽을 수는 없다. 한 분씩 내가 좋아하는 작가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요즘 들어 잦아지는 느낌이다-많이 슬퍼진다. 아주 많이 잃어버리는 느낌이 든다. 나의 어떤 노력으로도 다시는 얻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책은 작가가 2013년 3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쓴 글을 담고 있다. 그 사이 우리나라에 큰 일이 몇 있었다. 책을 읽어 나가면 이 시기의 모습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 초반에는 작가가 억누르고 있는 분노와 한탄이 글을 읽고 있는 내 마음까지 떨게 만든다. 그랬다, 이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참 속 터지던 시절이었는데, 나 혹시 그 새 다 잊었나? 작가가 금방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도 말씀하셨는데...... 쉽게쉽게 놓아버리고 사는 정신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는 산문, 이 책 속의 글이 이런 글이다.


마냥 짜증나는 정치판 이야기이지만, 마냥 암담하기만 한 우리 사회이지만,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앞을 보면서 주변 사람을 살펴야 하는 시대다. 어디에 있는 누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누가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글마다 알려 주고 있다. 간결하고 냉철하고 분명하게. 흐릿한 부분이 한 점도 없다. 날카로운 비판마저 아픔을 넘어 시원하다. 좋은 산문의 본보기가 얼마나 많이 실려 있는 건지, 함께 읽고 말을 나눌 이가 없어 섭섭했다. 독서 모임 교재로도 적절하겠는데. 


길지 않은 분량의 글마다 아주 멋진 말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이게 글을 쓰는 실력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옮기면서 기뻤다. (y에서 옮김20181107) 

인터넷 문화를 진심으로 바로잡고 싶다면 질이 좋은 콘텐츠를 그것도 대량으로 제공하는 길밖에 다른 방책이 없다. 물론 비용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아리송한 저 거창한 토목 공사에 비하면 사실 과자값에 불과하다. 높은 자리에 있는 한 사람이 그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만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니 역시 어려운 일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 P18

함께 번영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실천하는 지혜가 진정한 앎이며, 한쪽의 동포가 비극적인 결단을 내리지 않도록 도울 수 있는 힘이 진정한 국력이다. - P22

문제는 민주주의다. - P27

외래어는 외국어에서 왔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 속에서 외롭게 사는 언어라는 뜻도 된다. - P43

공공의 언어는 게으를 수 없다. - P47

식민주의의 권력자들은 삶을 통제하기 전에 먼저 삶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 P50

정장을 하고 4대 보험 직장에 출근하는 것만이 취업이 아니란 것을 아는 것이 창조의 시작이다. - P55

그러나 대학이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좁은 울타리 안에서나마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삶의 모델을 만들고 실천하는 일이다. - P67

사전의 이념은 민주주의다. - P85

언어는 사람만큼 섬세하고, 사람이 살아온 역사만큼 복잡하다. 언어를 다루는 일과 도구가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한글날의 위세를 업고 이 사소한 부탁을 한다.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 - P97

학문에서 제 나라 말을 소외시킨다는 것은 제 삶과 역사를 소외시키는 것과 같다. - P101

무정함은 무정함을 반성하지 않는다. ...... 난폭함은 난폭함을 반성하지 않는다. - P108

인성 교육이란 폭넓게 맗말하면 인문학 교육이고, 인문학이란 결국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려는 생각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르는 공부다. 사람은 산업 역군이기 전에 사람이고 국가의 간성이기 전에 사람이다. 어떤 정책이나 정치적 이념에 맞게 사람을 교양하려는 시도는 벌써 사람을 배반한다. 사람이 국가나 제도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제도가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한 진실이고, 그래서 잊어버리기 쉬운 진실이다. 학생들의 인성 교육을 위해 국정교과서로 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혹시라도 부종리의 마음속에 있다면, 그는 자신의 인성부터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이다.(2015.1.31.) - P112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에 우리를 다 바쳐야 한다. 그때 넘어진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 P127

지식과 의식의 깊이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낭비에 해당하며, 그 낭비에 의해서만 지식은 인간을 발전시킨다. 외국어로는 아는 것만 말할 수 있지만 모국어로는 알지 못하는 것도 말한다. - P144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언어를 지키고 가꾼다는 것은 그들만을 위한 의무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의무가 된다. - P149

지옥은 진정한 토론이 없기에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이다. - P158

식민지의 가장 큰 불행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들이 제 운명을 제 뜻대로 기획하고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 P160

한 인간의 고뇌가 세상의 고통이며, 세상의 불행이 한 인간의 슬픔이다. - P169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타자를 품고 산다. 자기이면서 자기인 줄 모르는 자기, 자기라고 인정하기 싫은 자기가 자기 안에 있다는 말이다. - P173

정신과 육체의 식민화 시도도, 등단·비등단을 칼같이 가르는 등단 제도도 모두 남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열등감 문화의 소산이다. - P191

진보주의를 삶의 방식으로만 말한다면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다. - P197

역사의 발전은 늘 희생자의 서사로부터 시작한다. - P219

간절하게 바라보는 현실은 현실보다 조금 덜 현실이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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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서커스 ㅣ 베루프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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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 이것에 대해 여러 사람의 글을 읽은 것 같다. 왜 쓰는지, 각자의 가치관과 사명에 따라 이유를 밝혀 놓은 글들이었다. 아, 이래서 쓰는구나, 어떤 내용들에는 공감했고, 어떤 내용들에는 의아하게 여겼다. 그러면서 나도 내가 글을 왜 쓰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왜 쓰려고 하는 걸까, 지금 나는 이 글을 왜 쓰고 있는 걸까, 왜 이 글을 알리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은 이런 물음에 대해 궁리하게 한다.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화자는 잡지사 기자이고, 그녀는 기사를 쓰려고 취재를 하면서 이 물음과 만난다. 언뜻 가벼워 보이는 분위기이지만 전혀 가볍지 않았다. 기자가 기사를 쓰고 세상에 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명감? 돈? 자기 만족? 표현의 본능? 때로는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을 받게 되는데? 써야 할 것을 써서 알리는 것만큼이나 쓰지 말아야 할 것 혹은 알리지 말아야 할 것을 알리지 않는 것도 기자의 사명 중 하나라는데? 


읽는 동안에는 쓴다는 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는데, 막상 정리를 해 보려고 하니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다. 소설의 화자만큼이나 내 마음도 복잡하게 움직인다. 이기심이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하고 싶고, 그런데 다른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설득력이 모자라고. 그러니 자꾸만 변명같은 것을 구하게 된다. 


나는 왜 쓰는가. 내가 쓴 글로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것에 정녕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자부심을 갖고 싶어서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내가 나를 돌아보기 위한 차원에서 쓰고 있는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 꽁무니를 빼고 싶은 마음이다. 나서고 싶은 것은 무슨 마음이고 물러서고 싶은 것은 무슨 마음인지, 내가 생각해도 참 쑥스러운 이중성이다. 


이제까지 읽은 이 작가의 소설 분위기와는 좀 달라서 새로웠다. 세밀한 전개 방식은 유사한데 배경이 네팔이어서 그런가? 이 소설 덕분에 네팔의 카트만두를 새로운 기분으로 다녀온 느낌이 들어 괜찮았다. (y에서 옮김201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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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서 하늘 보기 - 황현산의 시 이야기
황현산 지음 / 삼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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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이라는 생각을 거듭 하면서 읽는다. 내가 좋아하는 좋은 글은 나를 일깨우는 글이다.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바로 하고 있느냐고, 생각이든 행동이든 나를 자꾸 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그래서 나는 좋은 글을 읽고 있으면 홀로 자랑스러웠다가 홀로 부끄러웠다가 홀로 뿌듯했다가 홀로 민망해지곤 한다. 아무도 나를 보고 지적하는 일이 없어도 나는 스스로 의식하고 스스로 웃는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 현대 역사에서 아픈 기준으로 계속 살아날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확인했지만 언급하지 않는 책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우리가 얼마나 반성하고 얼마나 행동을 바꿔 나가야 할지, 마음은 급한데 아득하기만 하다. 글만 읽어도 여전히 이렇게 먹먹한데, 그 아픔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지. 


시를 작가의 산문으로 읽고 작가의 산문을 새로운 시로 읽는 이 기분, 이런 글읽기는 여건만 된다면 계속 하고 싶다. 책도 계속 붙잡고 있고 싶고, 글읽는 시간도 더 찾아내고 싶다.(작가에게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김현 교수의 책이 자꾸 떠오르면서 새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 (y에서 옮김20160311)



작가가 된다는 것은 변호사가 된다는 것과 다르고 의사가 된다는 것과 다르다. 공부를 많이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글을 잘 써야 하지만 글을 잘 쓴다고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문학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야 하지만 지식의 풍부함이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것일 수도 있고 훈련된 것일 수도 있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고, 그 능력이 발휘될 계기가 필요하다. 하기 쉬운 말로 흔히 미학적 재능이라고 부르는 이 능력은 둔중한 것에서 날카로운 것을 발견하고 단단한 것에서 무른 것을 발견하며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의 질서를 바꾸는 힘이다. - P37

사람살이는 무한하게 넘실거리며 어제 중요했던 것들의 질서를 오늘 바꾼다. 저 먼 물결의 끝에서 하찮은 것들이 하찮은 신음을 내지른다. 한 세상의 도리를 강구한다는 근엄한 선비 앞에서 갱피 훑는 여자는 참으로 하찮은 존재다. 열녀의 절개는 기생의 딸 춘향이 넘볼 철학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 저 하찮은 것들의 말이 아니라면 어디서 숭고한 말을 찾을 것인가. - P60

<일대종사>에서는 말한다. 무술에는 자기를 보는, 천지를 보는, 중생을 보는 세 단계가 있다고. 저를 본다는 것은 저 자신을 안다는 것이고, 천지를 본다는 것은 저 자신이 미약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중생을 본다는 것은 인간들의 열정을 생각한다는 것이겠다. 한 인간의 열정은 시간 속에 재가 되어도, 저 열정들은 천지에 가득하다. - P69

실천은 지금 이 자리의 실천일 때만 실천이다. 진정한 삶이 이곳에 없다는 말은 이 삶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이 삶을 지금 이 모양으로 놓아둘 수 없다는 말이다. - P98

예술의 희생보다 세상의 희생이 먼저 있다. 예술이 세상을 낯선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갑자기 낯선 것이 되어 버린 사람들을 위해 예술이 있다. 예술에 희생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희생 뒤에 겨우 예술이 있다. 믿음과 사람이 그렇게 어렵고, 믿음과 사랑이 그렇게 절박하다. - P130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최승자) - P193

시 쓰기는 끊임없이 희망하는 방식의 글쓰기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가 말하려는 희망은 달성되기 위한 희망이 아니라 희망 그 자체로 남기 위한 희망이다. 희망이 거기 있으니 희망하는 대상이 또한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희망이다.

꽃을 희망한다는 것은 꽃을 거기 피게 한 어떤 아름다운 명령에 대한 희망이며, 맑은 물을 희망한다는 것은 물을 그렇게 맑게 한 어떤 순결한 명령에 대한 희망이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은 희망을 단단히 간직하는 일이다. - P262

산문은 이 세계를 쓸고 닦고 수선한다. 그렇게 이 세계를 모시고 저 세계로 간다. 그것은 시의 방법이 아니다. 시가 보기에 쓸고 닦아야 할 삶이 이 세상에는 없다. 시는 이를 갈고 이 세계를 깨뜨려 저 세계를 본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것이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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