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지나간다
구효서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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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억을 부르는 나이는 좀 쓸쓸한 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에 대해 더 많은 애정이 생기는 나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고 부질없는 후회나 회한을 갖는 나이, 그때 내가 그랬더라면 내 인생은 지금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고 쓸데없는 가정을 해 보는 나이. 그래서 나는 사실 추억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책에는 그러한 추억과 관련된 사물들이 많이도 담겨 있다. 이미 서른을 훌쩍 넘긴 사람들, 그런데 아직 쉰은 되지 못한 사람들, 그 시절이라면 누구나 대충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 다들 그렇게 힘들고 다들 그렇게 열심이었던 나날들. 그 속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또하나의 생명체로 살았던 낯익고 정겨운 사물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고유한 옛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매개체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만의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 책에 이미 나와 있는 것 말고 뭐가 없을까. 내 어릴 적을 돌이켜 줄 그 무엇. 생각해 보니 나는 이 작가보다는 조금 늦게 세상을 살아왔다는 게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집에 처음 텔레비전이 놓였던 적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고, 중고등학교 때는 김자옥의 사랑의 계절을 듣노라고 저녁 8시 40분만 되면 라디오에 귀를 박고 살았다. 그 때 그토록 감명깊었던 사랑 이야기들은 지금도 내 마음 속에 그림자로 남아 가끔 나를 한숨짓게 만들기도 한다. 고교야구는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박노준과 김건우가 나오는 선린상고와 성준이 있는 경북고와의 황금사자기 결승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의 스포츠 중계석을 하는 늦은 밤 시간에는 그날의 고교야구 하일라이트를 보여주기도 했었다. 아참, 대학가요제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가요제 실황을 우리는 공테이프에 녹음을 했었다. 그리고는 다음해 대학가요제를 다시 할 때까지 그 테이프를 들으며 노래들을 익혔다. '꿈의 대화'나 '바윗돌' 같은 무수한 명곡들....

나는 기껏 책을 한권 읽었을 뿐인데 나의 상념은 이대로 끝이 없을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추억은 다른 사람의 것대로 아름다우리라. 나는 또 나대로 나의 추억에 젖는다. 이미 잊었던 것, 몹시도 잊고 싶었던 것, 그러나 영 잊혀지지 않는 것,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잠시나마 푹 잠겨 있을 수 있어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행복했다. 읽고 난 한참 후까지도. (y에서 옮김20010102)

심지어 사랑에 빠진 사람 중에는 사랑하는 상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상대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상대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은 거울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 거울에 비친 자신마저 자신이 아닐 때 우리가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아니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는 유래와 종족을 알 수 없는 숱한 왕자나 숱한 공주만을 보고 사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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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이별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89
류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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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이라는 것을 채 배우지도 못한 상태에서 접하게 되는, 어릴 때의 어떤 경험은 일생을 함께 하는 놀이가 되기도 하고 직업이 되기도 하고 꿈이 되기도 한다. 내게는 '시 쓰기'가 그런 경험 중 하나다. 돈이 들지 않는 취미이자 특기가 될 수 있었던 시 쓰기, 한때 시인이 아니었던 어린이는 없었다는 말까지 있고 보면 어려서 참 쉽고 다정하게 접할 수 있었던 게 시이기는 했다. 그랬는데 어쩌다가 우리는 시를 읽고 시를 쓰는 마음을 놓치고 말았던 것일까. 그리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일도 아닌데 말이다.

 

앞서 나온 작가의 시집을 읽었고, 어렴풋이 괜찮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기억이 있고(내가 쓴 리뷰를 다시 확인해 보니 망설이고 있기는 하지만), 이 시집도 읽어 나가면서 괜찮구나, 괜찮구나, 잡히는 구절도 많구나, 좋게 중얼거렸다. 다만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면서 이 반가움이 줄어들더니 4부에 이르자 '흠, 내 취향과는 멀어졌는데?' 하기에 이르렀다. 그럴 수도 있지. 앞선 반가움만 해도 어디랴. 이만큼이면 만족스러운 시집인 거지.

 

나는 시인이 쓴 구체적이지 않은 표현, 몽롱한 표현이 더 좋다. 생활에 가까운 표현일수록 읽기에 쑥스럽다. 내가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어서 거북함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굳이 이 시인의 작품에서만 이런 기분을 갖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생활에서 아주 멀어진 관념시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가운데쯤, 생활과 이상의 가운데쯤에서, 만남과 이별의 가운데쯤에서, 현실과 기억의 가운데쯤에서 떠돌고 있는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땅과 하늘의 가운데쯤에 있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대신이라고나 할까? 어중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도, 어중간하니 도리어 아무것이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이 더 크다고 우기고 싶을 만큼.  

 

잊고 싶고 잊혀지고 싶은 계절이다. 그 대상이 특별한 몇몇이라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들도 이제부터는 부디 나를 잊어 주기를.  (y에서 옮김20170921) 

당신은 어떤 과거를 보관하기 위해 모든 것에 옷을 입히고 싶어 하는가. 나 또한 고요한 것은 진실 이전의 일이라 믿는다. - P13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 P16

아무 데서나 황야를 생각한다 - P18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어서 퍽 안심이 됩니다 - P21

사는 것은 늘 지루한 혼잣말 - P28

잊혀진다는 건
좋은 일이다
봄날 내 가슴에 처음 온 꽃잎으로 피었다가
오는 비 가는 세월에 남김없이 스러져
저물어간다는 건 - P44

아무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닌
그러나 그 모든 것이어서 슬펐던 날들을
기억해야지 - P47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 P48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바랍니다 - P49

세상에 너만 남겨져
혼자서 아프라고 햇빛 비추는 것 아니다 - P51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가득 찬 목숨 안에서 당신 하나 여의며 사는가 - P63

우리가 살아서 서로의 옛날이 되고
옛날의 사람이 되어서 결국 옛날 애인이 될 것을
그날 하루 전에만 알았던들 - P125

아주 지는 꽃
끄트머리처럼 내 그늘이 밝았다 - P127

그러니 잘 지나간 것들은 거듭 잘 지나가라
나는 이제 헛된 발자국 같은 것과 동행하지 않는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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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계절
구효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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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간절하게 파묻히도록 하다니. 겨울은 겨울답게, 여름은 여름답게, 봄은 봄답게, 가을은 가을답게, 더할 수 없이 절절하게 그 계절을 느끼고 살게 한다. 지독하다. 지독해서 좋을 수도 안 좋을 수도 있겠는데, 처음에는 지긋지긋했다가 나는 점점 좋아졌다.  계절이란 모름지기 이렇게 확실한 얼굴을 보여야지 싶으면서.

 

이 작가를 좋아하므로, 좋아해서 갖는 선입견도 있다. 이 소설집은 이 선입견이 소설을 읽는 나를 좋은 쪽으로 더 자극했다. 내가 모르고 있던 작가였다면 이만큼 몰입할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이 작가니까, 이 작가가 쓴 글이니까, 이 작가가 이렇게 썼다면 이렇게 쓴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내가 그 이유를 금방 알아내기 힘들어도 분명히 이렇게 쓴 어떤 의도가 있을 테니까, 그 이유를 찾아내는 일은 내가 이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일 테니까, 그러면서 읽었다. 그리고 역시 그러하였다.

 

이야기나 사건이나 인물의 감정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상황이, 인물이 처한 상황이, 그 상황을 바라보는 인물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그 계절에 그 인물의 곁에 바짝 다가서 있는 느낌이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그런데 그런 눈으로 같이 바라보는 게 마냥 상쾌하지가 않다. 온몸이 자잘하게 떨리고 불만스럽고 될대로 되라는 기분이 제멋대로 든다. 작가가 의도했던 것일까. 세상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도 않는데, 한 번 더, 아니 몇 번씩이나 되새겨주는 것처럼, 거봐, 지치지? 힘들지? 포기하고 싶지? 그래도 포기가 안 되지?, 약올리는 것처럼.

 

다른 책에 비해 나로서는 오래 갖고 다니면서 읽은 책이다. 후루룩 넘겨버리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되지 않았다. 더 읽었으면 좋겠다. (y에서 옮김2017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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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 견문록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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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다는 느낌, 이 느낌만 붙잡고도 책을 만들어낸다. 글과 그림과 만화까지 섞어서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의 귀여움을 놀랍도록 펼쳐 보이는 작가. 나는 왜 이런 귀여움을 못 느끼는가 살며시 한숨이 나오던 게 여러 번이다. 뭔지 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드는 거다. 다른 사람은 충분히 느끼는 감각을 나는 못 느낀다 싶으니까. 그게 아무리 하잘것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어쨌든 대단하다. 내가 가장 대단하다고 여긴 점은 관련 책을 찾아본 작가의 정성이다. 일본에는 이런 책도 있나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몇몇을 옮겨 본다. 일본어린이놀이 대도감, 에도 시대 어린이놀이 대사전, 실뜨기학, 전승놀이 사전, 멜론빵의 진실, 상쾌한 입김의 과학, 쇼와레트로 박물관, 부전나비 관찰사전, 철도 도시락학 강좌, 젓가락, 고양이 사전, 고양이 교과서, 생활의 말 신 어원사전, 도설 에도요리사전, 사전 화과자의 세계, 일본명과사전, 색이름 사전 507 등등. 어쩌면 우리에게도 비슷한 책들이 이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모르고 있을 뿐. 귀여움을 글로 옮기기 위해 이런 자료들을 다 찾아봤다니 다시 생각해도 대단하다.

귀여운 것들은 사실 생존의 필수 요소는 아닐 것이다. 이왕이면 귀여운 게 보기도 좋고 마음도 놓일 테니 선택을 하는 때가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바로 이 귀엽다는 이유로 거부하기도 할 것이다. 귀여움은 자칫 가볍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고 이게 싫을 수도 있을 테니까. 나는 귀여운 것에 평균 이상으로 끌리는 쪽이라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귀여운 그림, 귀여운 색깔, 귀여운 느낌 등등으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귀여움의 세계가 내가 생각해 오던 것보다 엄청 넓어서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책을 읽고 나니 갑자기 주변의 물품들을 주의깊게 보게 되는 후유증이 생긴다. 이게 귀여운 건가, 얼마나 귀엽다고 할 수 있는가, 귀여워서 내가 지금 좋은가... 후훗, 한동안은 이렇게 묘한 기분에 시달릴 듯하다. (y에서 옮김202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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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선현경의 일일일락
황인숙 글, 선현경 그림 / 마음산책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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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무조건 산다. 그리고 무조건 호감으로 읽기 시작한다. 혹 마음에 안 든다 싶어도 무조건 이해해 주려는 마음으로 읽는다. 그러면 그러는 내내 행복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행복했다. 작가는 아마도 제한된 글의 분량 조건 때문에 할 말을 길게 풀어내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 같다. 분명히 좀더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도 서둘러 마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을 글들이 꽤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은 순전히 내 생각이다. 작가는 완벽한 한 편의 글을 써 놓은 것인데, 내가 그 완결성을 알아보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글의 완성도에 대한 내 편견. 어?, 이렇게 글이 끝난 것인가 의문하면서 넘기다 보니, 또 그런대로 여운의 맛이 있다. 나는 이 작가의 글을 비판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싶었으니까.

이 책을 통해 다시 확인해 본 작가의 일상-고양이, 시인들과의 교제, 음식, 쇼핑, 여자들의 수다, 나이든 여자 솔로의 우아함과 서글픔,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이런저런 여행담, 그리고 친구 이야기.

하루에 하나씩만 즐거움을 글로 적을 수 있다면 그 삶은 너무나 행복한 것이리라 싶다. 곁들여 보여주는 선현경의 그림도 정답고,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은 소소한 기쁨이 예쁘다. 내 생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인데, 느끼고 생각하는 게 다르고 차이가 날 뿐인 것 같다. 나도 행복하고 기쁜 하루하루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매일 기쁜 일 하나씩 구해서 글로 써 나갈 수만 있다면.. (y에서 옮김2008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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