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 문학과지성 시인선 521
류인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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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이끌려 뽑은 시집이다. 이 놀이터는 어떤 놀이를 하게 해 줄 것인가, 궁금증과 기대감을 품고 읽었다. 읽다가는 반갑게도 군데군데 머물면서 놀았다. 어떤 놀이는 이유도 모른 채 빠져들게 만들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기분으로 다 헤아리지는 못하겠구나 싶으면서도 옮겨 보았다. 문장 하나하나의 결이 읽는 순간의 나를 끌어당겼다. 이만하면 족하지 않느냐고, 이만해도 충분하다고. 


그렇다고 해도 한 권의 시집에서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의 전문을 얻지 못하면 퍽 섭섭하다. 시인과의 만남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느낌이 드는 탓이다. 문장들 여럿보다는 온전한 한 편의 시가 더 나을 때가 많은데. 시인이 펼쳐 놓은 길들이 군데군데 막혀 있는 듯, 내 쪽에서 열기만 하면 되도록 숱한 잠금 장치가 내 앞에 보이는데도 열지를 못한다. 누구를 탓하랴.  


거북한 느낌으로 읽게 되는 시어들이 많이 보인다. 강하고 거친 단어들과 이 단어들이 빚는 험한 세상으로는 다가설 마음이 안 난다. 나는 여전히 시 속에서 보호받고 싶은 성향이 강한 상태다. 그 어디에도 부딪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안 들 정도로. 옮겨 놓은 구절을 다시 읽어 보니 이 시집의 가장 여린 대목들만 데려온 것 같다. 낯부끄럽게도.   (y에서 옮김20210318)



너도 잠수부처럼 배를 버리고 물결치는 물의 어둠 안으로 들어간다. - P9

간혹 밤의 라디오가 구워주는 음악 편지가 빵 속보다 촉촉하다 - P10

흙 아래 작은 꽃 피우는 젖은 눈이 있다 - P13

나는 마음의 육체성을 따라가보려 한다.
느린우체통에 맡긴 엽서 걸음일 테다. - P15

데워진 모래는 한결 기분이 좋다 - P18

바람은 어디서 바람과 만나 기다리는 바람을 낳나 - P24

일몰이 비껴가는 창에서 하루 중 풍경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을 조작한다 - P38

떠날 수 있는 이의 행장은 가벼우리.
무거운 것은
먼지와 고요, 햇빛.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 꾼 적 있는 꿈을 다시 꾸는 일. - P54

골목은 골목에서
간신히 놀고 있네
소실점을 얼굴에 둔 그림처럼 눈동자 안으로
흔들리며 걸어가는 골목들 - P68

얼음의 날씨를 열며 닫으며
고요의 회복기를 고요와 함께 견딜 때
날개가 품은 바람길을 빌려주던 창문, 해변들 - P77

거리에는 언제나 기억을 가리기 좋을 만큼 어둠이 있다 - P94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걸어서 오오
오늘은 오늘로부터 걸어서 오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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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공장 - 소설가 김중혁의 입체적인 공장 산책기
김중혁 글.그림 / 한겨레출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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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탐방에 관한 글은 하루키 산문집에서 먼저 본 적이 있다. 그때도 참 신선했다는 생각을 했고, 이 에피소드는 대상만 적절하게 바꾸어 나간다면 꽤 지속적인 여행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일을 우리나라에서는 이 작가가 한 모양이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공장이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고단하고 지친 이미지에 대해서는 작가가 충분히 잘 말해 준다. 세련된 현대 공장의 이미지보다는 우리가 힘들었던 시절 혹은 산업혁명의 부정적인 영향을 공부할 때 얼핏 보았던 장면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공부 못하면 공장에 가야 한다는 말을 협박처럼 들어야 했으니까.(공장은 그런 곳인 줄 알았다. 힘들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참고 참고 일해야 하는 곳.) 


지금이라고 해서 우리네 인식이 그렇게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나 역시 전혀 모르고 있는 쪽이지만, 가끔 텔레비전 뉴스로 보는 자동화된 공장 라인을 보노라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공장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는 일은 이래저래 필요할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꼭 해야 하는 일과 기계가 할 수 있는 일로 나뉘는 지점에 사람이 서 있다. 어느 쪽으로 향해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만큼은 결국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일 것이고. 앞으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직업이,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다. 


공장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재미있기도 할 것이고.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생겼다. 무기 공장, 돈 공장 이런 곳도 구경해 봤으면 하는 것. 현실성은 없지만. 공장 입장에서는 탐방로를 만드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겠다. 공장의 긍정적인 면을 알리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행사에서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공장탐방상품을 개발하는 것도 어떨지. 이렇게 주절주절 쓰고 있으니 나도 어쩐지 작가의 궁시렁거림 일부에 전염된 것 같구나.  (y에서 옮김201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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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 김용택 시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555
김용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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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순간순간의 장면을 시의 구절로 바꿔 부를 수 있기를. 시인이 쓴 시의 문장을 불러 내어도 좋고 시인의 도움으로 내가 써 본 시라면 더욱 좋고. 시집을 펼칠 때마다 바라는 마음이다. 선물처럼 행운처럼 축복처럼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내 마음. 2022년 나의 첫 리뷰 대상은, 이렇게 선물이 된 이 시집이다.


책은 지난 여름에 나왔는데 읽고 보니 겨울이 깊다. 다른 계절이 흐르고 있음에도 유독 겨울 자리에서 자꾸만 눈이, 마음이, 손이 멈춘다. 내가 이 시집을 읽는 시간과 시인이 시를 쓴 시간이 모르는 바람, 아는 바람과 섞이면서 더 깊어진다. 더 고요해진다. 그래서 나는 또 맑아지고 분별력을 얻고 쨍한 추위에도 마음을 연다. 그렇지, 세상의 어느 것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그리 두껍지 않은 시집, 몇 차례를 앞에서 뒤로도 읽고 뒤에서 앞으로도 읽고 아무 쪽이나 펼쳐 읽는다. 그러다가 마음을 한데 모아 골라낸 구절을 한 줄씩 타이핑을 한다. 뽑혀 나온 문장이 시 안에서 살아나 내게로 온다. 이렇게 많아지면 좀 곤란한데, 좀 많이 벅찬데, 좀 많이 행복해지는데…


쉽게 읽히는 시들이다. 쉽게 읽혀도 쉽게 넘기지 못하는 시들이다. 매일 보고도 몰랐던 풍경과 매일 읊어도 무심했던 일상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받고 사는 이 자체로 은혜로운 일임을 나직하게 들려 준다. 작고 약해 보이는 것들로부터 크고 강한 힘을 얻을 때의 놀라움과 반가움에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내가 삶에 대해 갖는 태도의 한 면일 것이다.   (y에서 옮김20220101)

당신이
처음입니다 - P7

생각을 다 모아봐도, 내 어디인지 모른다는 그게,
좋다 - P9

나비는 얼마나 먼 데서 달려오다가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을까요 - P11

별들은 하늘에서, 어느 날은 다르고 어느 날은 또 다르다 나는 그 다른 날들의 별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추억해내 행복해하고, - P13

아기 나무는 일 년 동안 아름다운 외줄기다 - P21

세상에 무슨 일로 저렇게 마을이 일일이 하나하나가 다 가을이란 말인가 - P25

나는 남이 이루어놓은 나의 어둠을 이따금 바라본다 - P34

오늘이 이렇게 난생처음인데 - P38

모든 것은
제때다
해가 그렇고, 달이 그렇고
방금 지나간 바람이,
지금 온 사랑이 그렇다
그럼으로 다 그렇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살아오면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있었던가 - P45

오래된 길들은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알고 있다 - P52

누구도 불행하게 하지 않을 마른 낙엽 같은 슬픔
누구를 미워한 적이 없었을 것 같은 새들의 얼굴에 고요
누구의 행복도 깔보지 않았을, 강물을 건너가는 한 줄기 바람
한 번쯤은 강물의 끝까지 따라가봤을 저 무료한 강가의 검은 바위들 - P59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 아무런 것이 될 때
그때 기쁘다 그리고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갈 때 편안하다 - P64

나는 강에서 오는 바람을 좋아한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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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땅 캐드펠 수사 시리즈 17
엘리스 피터스 지음, 송은경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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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제목이 The Potter's Field로 되어 있다. 책을 다 읽고도 이 제목과 내용과의 연관성을 알아내지 못하여 찾아보았다.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 도공의 땅이 욕망의 땅이 된 이유는? 성경에 '도공의 밭'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욕망이라는 단어에 붙잡혀 끝까지 땅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관련시켜 읽었는데 살짝 속은 느낌? 어차피 두루두루 잘 속는 나로서는 딱히 변명할 것이 없기는 하지만.


도공의 땅이 사건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는 했다. 도공이 어여쁜 아내와 살았던 땅, 그러나 도공은 아내를 버리고 수사가 되어 수도원으로 들어갔지. 이후 남편으로부터 버려진 아내는 사라져버렸고 그 땅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이 여자는 누구인가? 도공의 아내인가, 또다른 여자인가. 


죽은 사람의 신원을 밝히는 일은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의 궤적을 모두 찾아내는 일과도 같다는 말이 생각났다. 어떻게 왜 죽었는가 하는 점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점과 같은 맥락에서 헤아려야 한다는 것.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살아왔다는 말과 같은 말이라는 것의 뜻도 알겠다. 나는 범인보다 이 점에 더 유의하며 이 소설을 읽은 셈이다. 여기에다가 제목에 나와 있는 욕망까지 얹어서. 풀 수도 없을 문제를 나 혼자 만들어놓고서. 


내가 어설프게 추리한 방향과는 아주 엉뚱하게 사건은 해결되었고 나는 또 작가의 역량에 감탄했다. 이 문제를 이렇게 다뤘다고? 여자의 삶, 혹은 여자의 존재는 오로지 남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에 대하여. 작가는 1910년대에 이 소설을 썼고 소설의 배경은 그보다 천 년쯤 전이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자는 독립된 인격체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인가? 남편이-남자가 버리거나 죽으면 여자의 인생은 중단되는가? 남편이-남자가 사고를 치고 잘못을 저질렀는데 아내가-여자가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한가? 반대의 경우는 성립되는가? 글쎄, 내가 세상 사람들의 삶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니 무엇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재미있게 읽고 있다. 재미만 있는 게 아니어서 더 만족한다. 추리소설에서 인간의 본성을 읽는 일이 내게는 더없이 유익하다. 직접 경험으로 좀처럼 얻을 수 없는 능력이니. 남아 있는 책도 아까워하면서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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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되겠지 - 호기심과 편애로 만드는 특별한 세상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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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의 제목 그대로다. 책을 읽는 내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유쾌했다. 앞서 읽은 <미스터 모노레일>보다 이 책이 내게는 더 좋았다. 이게 내 취향인가 보다. 작가의 허구보다 작가의 진실에 더 이끌리는 점. 덕분에 모르고 있었던 작가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커트 보네거트, 레이몬드 카버, 스콧 슈만. 내 의식의 영역 한 부분이 넓어지고 있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유머도 구사하고 풍자도 하고. 일반적으로 나이 사십이 넘으면 하기 힘든 일을 여전히 품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말로는 '젊은 작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쉽지 않을 텐데, 쉽지 않다고 하면서도 꾸준히 도전하고 있는 작가의 삶이 그래서 내게 더 절실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내 딸처럼 아직 아무 것도 잡은 게 없는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런 사람이 되면 좋겠구나라기보다는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단다 하는 관점. 어쩌면 요즘의 젊은이들은 이십대에서 젊음이 그치는 게 아니라 사십까지 젊음을 이어가야 할지 모르는 수명 긴 세대에 있는 사람들이므로, 우리보다는 훨씬 오랜 기간을 젊음 속에서 부대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조차도 아직 늙었다는 기분은 아닌데 사십은 얼마나 창창하랴.

 

진지한 것도 좋고 진중한 것도 좋겠지만 유머에 나는 더 끌린다. 지금보다 더 재미있게 살아가고 싶다.  (y에서 옮김201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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