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한승원 지음 / 김영사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이었다. 이런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실제 살았던 사람이란다. 한승원의 글로 읽으니 인물의 삶이 더 잘 살아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상태였고, '차'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전혀 없었으니, 내게 이 글은 그저 새로운 영역이었다. 이렇게 살아간 사람이 있었다는 것, 이런 사람에 대해 수많은 조사를 하고 그를 소설로 만든 작가도 있다는 것,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정약용과 김정희를 간접적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는 것. 우리의 역사 속에 이런 시대와 이런 인물들이 있었다는 것. 


소설 속 글귀를 타이핑하면서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내 속에 떠오르는 말이 없구나. 그런데 글이 계속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내 속에 글이 머물다 보면 내 말도 생겨나겠지. 또 굳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해도 어떠리. 머물고 있는 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한 것을.  (y에서 옮김20120418)

달빛 비친 산이 그림자를 만들고,
대나무나 꽃이 그림자를 만든다.
세상보다는 세상의 그림자가 더 아름답다.
그림자에게는 거짓이 없다.
꽃보다 꽃의 그림자가, 대보다 대 그림작가 더 아름다워.
그림자는 숲 뒤편에 있고, 대나무가 디디고 선 땅 아래에 있고,
강물에 있고, 네 마음 속에 있지.
그림자 속에 달이 있다.
달이 부처님이라면 중생은 그림자 아니냐?
부처님의 그림자는 중생들 속에 있고, 중생들의 그림자는 부처님 속에 있다.
부처님을 알려면 중생을 알아야 하고, 중생을 알려면 부처님을 알아야 한다.
세상 살아가는 참 이치를 제대로 그리려면 세상의 그림자를 잘 그려야 한다.
그림자를 그리면 달은 그 위에 둥두렷이 떠오르게 되어 있다. - P143

‘엉뚱한 데에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초의는 할아버지 몰래 읽은 노자와 장자에서 엉뚱하다는 말의 해답을 얻어냈다. 잘 가는 자는 자국을 남기지 않고, 잘 묶는 자는 밧줄 없이도 놓여나지 못하게 묶고, 잘 잠그는 자는 빗장 없이도 잘 잠근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힘, 세상을 올곧게 나아가게 하는 그윽한[玄] 힘이다. 말하자면 도道라는 것이다. 엉뚱한 표현이라는 것은 그윽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 P144

사람은 모름지기 두 개의 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하나는 거울(龜鑑)이고, 다른 하나는 숫돌(他山之石)이다. 거울은 올곧은 일을 하는 성인의 삶인데 거기에 몸과 마음을 비춰보며 살아가야 한다. 숫돌은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의 행실이다. 그것은 다른 산에서 나는 우둘투둘한 돌일지라도 내 심신의 성정을 벼리는 데 숫돌로 쓰면 된다. - P160

사람이 누구인가를 오매불망 진실로 사모하면 그를 닮게 됩니다. 선비도 그렇습니다. 한 선지자를 진실로 사숙하게 되면 그의 모든 것을 닮게 됩니다. 학식이나 인자함이나 세상을 보는 눈이나...... 심지어는 표정이나 행동까지도요. 좋은 그림은 좋은 시이고, 좋은 시나 그림은 그 사람의 마음의 표상이고 그윽한 그림자입니다. - P172

사람이 글을 읽는 것, 글씨를 쓰는 것, 시를 짓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나귀를 타고 길을 가는 것하고 같습니다. 길을 가는 목적은 나귀를 타고 흔들거리며 가는 데에 있지 않고 지나쳐 가는 풍광을 음미하고 목적지에 이르는 데에 있습니다. 글 읽고 글씨 쓰고 시 짓고 그림 그리는 그것들의 등뒤 쪽에 사람이 만들어지는 법입니다. 향기로운 사람, 모나지 않고 동그라미같이 원만한 사람...... 그렇다고 두루뭉수리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자는 서로 화합하면서도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소인은 개성을 지니지 못한 채 부화뇌동합니다. - P173

사람에게서 문장이 나오는 것은 풀이나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 심는 자는 나무를 심을 때 뿌리를 북돋아 주고 줄기를 안정시켜 주면 됩니다. 얼마 지나면 진액이 올라서 가지와 잎이 퍼지고 꽃이 핍니다. 꽃은 밖으로부터 가져오지 못합니다. 성실한 뜻과 바른 마음으로써 뿌리를 북돋우고, 독행 수신으로써 줄기를 안정시키고, 경전과 예를 깊이 연구함으로써 진액을 빨아올리고, 널리 듣고 아름다움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잎과 가지를 퍼지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장 쓰는 도리입니다. 문장은 밖으로부터 가져오지 못합니다. - P177

세상은 낡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은 나이 들어 낡아가고 있으면서 늙어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늙어감은 금강석처럼 찬란하고 향기로운 무게를 더하면서 견고해지고 새로워지는 일이고 값진 일이지만, 낡아가고 있는 것은 썩어 소멸해 가는 것이고 미망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냄새나고 추한 것이었다. - P201

벽이란 바람벽만 벽이 아니다. 나를 막아선 세상은 모두 벽이다. 나의 참을 참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 모든 것들은 다 벽이다. 사람도 벽이고, 짐승도 벽이다. 부처도 벽이고 조사도 벽이고 중생도 벽이다. 우주의 시공 모두가 벽이다. - P271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상을 분석하고 따지고 가리고 우열을 매기고 순서를 정한다. 그러한 순서 정하기는 화합하는 총체성의 우주를 놓칠 뿐만 아니라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논리는 논리를 낳고 그 논리는 다시 다른 논리를 낳는다. 결국 논리의 숲이 이루어진다. 울창한 논리의 숲은 진리를 보이지 않게 가린다. 그 숲 앞에 선 자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 길을 따지고 가리지 않을 수 없다. 따지고 가리는 일은 다툼을 만들고, 다툼은 자기 논에 물대기식으로 논리를 이끌어 간다. - P333

산은 산, 물은 물이 그것이다.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이라는 인식은, 산이 산 아니고 물이 물 아닌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라는 점에서 활인검이다. 그러나 그것이 거기 머물러 있을 때, 자기를 죽이는 칼이 된다. 살리는 칼이 되려면 ‘산은 산 아니고 물은 물 아니다’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거기 머물러 있으면 자기를 죽이는 살인검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살리려면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다’가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또 거기 머물러 있으면 자기를 죽이는 살인검이 된다. 그것을 살리려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가 나타나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화두 속에는 살인검과 활인검이 다 들어 있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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