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89
이재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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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람이 어릴 때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남은 일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 나로서는 시골도 도시도 아닌 소도시에서 자란 탓에 어릴 때의 추억이란 게 참 없는 편이다. 고작해야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운동장이나, 집 앞의 길에서 놀았던 게 전부이니까. 때문에 시골아이들처럼 풀이나 꽃이나 나무나 벌레에 대해서도 거의 모르고 자랐고, 그렇다고 도시의 아이들처럼 문화의 혜택을 누렸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점을 생각한다면 나의 어린 시절은 정신적으로 참 가난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란 사람을 부러워하는 편이다. 들꽃이름이나 나무이름을 잘 아는 친구들, 동네 냇가에서 놀면서 저절로 헤엄을 배웠다는 친구들, 곡식들이 어떻게 익어가고 과일이 어떻게 열리는지 아는 친구들, 물과 산과 언덕을 친구로 삼고 있는 친구들이 자라면서도 참 부러웠던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오로지 학교에서 배우는 책을 통해, 기껏 책 속의 사진을 통해서만 보고 외워야 했으므로, 나에게 있어 시골은 또다른 별나라였다.

크면서 시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골을 고향으로 둔 시인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들은 어찌 그리 끝도 없이 고향을 노래할 수 있는지, 나는 부러움 반 시기하는 마음 반으로 시골노래들을 넘기곤 했다. 완전히, 내 마음 깊은 곳까지는 도저히 와 닿아주지 않은 채 떠나버리는 싯구들이었다. 얼마나 오래 안타까워하면서 살아왔는지.

이재무의 이 시집에도 시인의 시골 고향이 가득 담겨 있다. 아직도 내게는 글자로만 왔다가 부딪힐 뿐, 실체로 잡히지는 않는 무수한 시골살림살이 시어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 이런 류의 시집을 읽을 때와는 내가 좀 달라진 것 같다. 그 때만큼 낯설지가 않다. 시골에서 산 지 3년이 되어 가면서 나도 모르게 시골을 익혀 가고 있나 보다. '텃밭 가득 달빛 푸른 푸성귀들'(40p)이나 '등허리엔 소똥 같은 땀방울 흘러내려/ 내를 이룬다 숨이 차'(57p) 하는 모습이나 '저물 무렵 밭둔덕에 외로이 서 있는/ 늙은 감나무와 나란히 서서/ 인생의 황혼을 억세게 갈무리하시는/ 아부지의 등허리'(72p)가 이토록 가깝게 여겨진 적이 없었으므로.

시를 짓는 일이나 시를 읽는 일이나 거기서 거기일까. 아니면 시를 잘 쓰지 못하는 대신에 시를 열심히 읽고 살 수 있도록 베풀어주신 은혜를 제대로 입은 것일까. 이 시집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또 어찌 나의 이러한 변화를 깨달을 수 있었으랴. 하여 시골을 고향으로 두지 못했던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으니 너무 속상해 할 일은 아니겠으나, 이제라도 시골의 삶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니, 무엇보다 이 시집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으니, 나는 또 이 시집에 고마움을 가져야겠다. (y에서 옮김20010805)

[인상깊은구절]
강 복판 속을
산맥처럼 우뚝 서서
달리는 물줄기를 보고 있으면
덩달아 마음이 급해지면서
어디든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금세 마음은 변덕을 부려
갓 걸음 배우는 아이처럼
서툴게 걷고 있는
여리고 부드러운 물살을 보고 있으면
덩달아 마음이
고구마순처럼 유순해지며
소홀했던 소중한 작은 약속들
수면 가득 떠올라온다
역사 이래 계절의 꽃 피워온 것은
강기슭에 볼 비비며 걷는
작은 물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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