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96
신철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7월
평점 :
이렇게 긴 장마는 내 기억에 없다. 지금의 인상이 너무 강해서 지난 기억을 지웠는지도 모르겠다. 이 길고긴 장마 안에서 이 시집을 읽는다. 장마가 시 속에도 그득하게 담겨 있다. 자연이 가져온 장마와 사람이 만들어낸 장마와 더위를 식혀 주는 시원한 장마와 눅눅해서 불쾌하기 그지없는 장마와 사람을 살린 장마와 사람을 살리지 못한 장마가 몽땅 들어 있다. 이렇게 묘할 수가, 이 시기에 이 시집을 읽고 있다니. 맑은 날 펼쳤더라면 금방 말라 버릴 습기로 제대로 읽어 내지 못했으리라 싶다. 그렇다고 이 장마가 고마운 건 결코 아니다.
시들은 온통 젖어 있고 물에 잠겨 있고 물에 잠겨서 슬픔을 흔들고 있다.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난 이들의 말없는 아픔과 하소연이 이렇게나 많았더란 말인가. 물은 슬픔의 뒷면이었던가. 거듭되는 슬픔은 슬픔의 결을 흐리게 하고 만다. 시를 읽을수록 나는 점점 둔해졌다. 뒤로 가면서 만나는 거친 시어들마저 둔해진 내 얼을 깨우지 못하고 만다. 이런 무기력, 이런 죄책감, 이런 원망은, 딱 싫은데. 나의 이 불평마저 시인은 냉엄하게 나무란다. 그런다고 네 죄의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면서.
전체를 고르는 대신에 한두 행씩만 골라 옮겨 보았다. 전체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골라낸 구절들은 좋았기 때문이다. 부분의 이끌림, 내가 품을 수 있을 만큼의 크기를 뜻하는 것이겠지. 시인이 뿌려 놓고 있는, 아픈 세상을 염려하는 말들 중에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이것밖에 못 품어서 한심하다고 해야 할까, 이만큼이라도 건져 올렸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장마의 습도가 너무 짙어서 요즘은 슬퍼하는 방법을 못 찾겠다. (y에서 옮김20200808)
내가 고개를 숙일 때 당신은
사막이었다가 사막의 선인장이었다가 사막의 밤을 횡단하는 기구였다가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눈사람이었다가 - P16
글자가 지나가지 않으면 나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 P18
당신은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처럼 모자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갔군요 - P21
자신이 고독하다는 생각이 그 고독에서 벗어나게 해줄 때가 있다 - P22
역전과 추월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우리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앞차의 꽁무니만 바라보고 있다 - P31
그러나 어떤 짐승도 가만히 엎드려 재앙을 기다리지 않는다 - P33
멀리 있는 것들이 궁금할 때가 있다 - P44
우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 곳으로
마음을 보내고 있었다 - P49
자신이 만든 그림자 속으로 몸을 던지는 낙엽들 - P74
하나의 슬픔이 다른 모든 슬픔을 아우를 때
하나의 거짓이 다른 모든 아픔을 짓누를 때 - P108
삶의 절반 동안 기억해야 할 일들을 만들고
나머지 절반 동안은 그 기억을 허무는 데 바쳐진다 - P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