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아침보다는 저녁이 좋다. 해질 무렵, '소멸과의 기나긴 싸움을 끝낸 노을'을 보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걸으며'(25p) 나도 이 시인처럼 늙어가고 싶다. 지금까지 새로이 한 세상을 여는 새벽이나, 눈부신 아침과는 제대로 사귀지 못하고 살아온 나로서는 저녁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저 마음이 설렌다.
이미 지나간 것은 왜 두고두고 우리 마음을 떨리게 하는 것일까. 추억이나 시간이나 하다못해 어느 하루까지 온전하게 시원하게 우리 곁을 떠나가 주지 않는다. 그러니 저녁만 되면 남은 안타까움을 붙잡고 헤맬 수밖에.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들을 애써 추억하는 시인의 깊고깊은 시선에서 좀처럼 내눈이 떨어지지 않아 꽤나 애먹은 순간이 있었으니.
시집을 넘기다 보면 가끔 부제목이 딸린 시를 만날 때가 있다. 영화 제목이거나 가수 이름이거나 시인 이름이거나 혹은 다른 그 무엇이더라도 나는 그들이 부럽다. 그러한 시들은 사랑이 담겨 있는 상상력을 보는 기쁨을 내게 준다. 사랑이 없다면 절대로 그렇게 보여지지 않을 세상과 사람들. 시인이 불러준 그 사람들은 정작 시인의 사랑을 알고 있을까.
오래 전부터 세상은 우리를 안고 있었고 앞으로도 우리를 이끌어갈 것이다. 1993년 초판본을 구해 읽었을 때의 그 아련한 기억이 아직도 내게 남아 있어, 지금도 저물 무렵 까닭 모르게 쓸쓸할 때면 이 시집을 들춘다.
(y에서 옮김20010612)
[인상깊은구절]
탕진해 버린 세월
문득, 살아온 날의 상처가
돌이킬 수 없이 엎질러진 어둠처럼
허허롭게 만져질 때,
강은 어느새 저문 날의 끝에서
하늘의 목젖을 젖히며 새 살인 듯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