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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 문명 - 개정판 ㅣ 현대의 지성 65
자크 르 고프 지음, 유희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평점 :
먼저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나는 어떠어떠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건 책 이전에 내가 가진 무언가가 있어야 서로 비교하면서 맞다,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인데, 나는 아직 그 경지 근처에도 이르지 못한 까닭이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에만(작가의 사관이 옳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충실했다. 그 일만도 아주 벅찼다.
얼마나 오랫만에 해 보는 생각인지 모르겠다.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왜 사는 것인지. 나는 이제부터 말로는 두말할 것도 없고 생각만으로도 '너는 왜 그렇게 사니?'라는 의문을 갖지 않기로 다짐한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삶은, 개인의 삶은, 자신의 삶은 자신만이 알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아닌 다른 누구라도 내가 될 수 없듯이 내 삶에 대해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나무랄 수는 없는 것이다. 삶이라는 게 그런 것이라는 것을 얼마나 오래 잊고 있었던지.
살아서 생명을 유지시키면서 존재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1000년 전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정반대쪽 땅에서 있었던 일들을 읽으면서, 과연 역사라는 게 무엇인가 근본적인 물음부터 되새겼다. 아울러 역사라는 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까지. 사람 사는 게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 어제가 오늘보다 못하고 내일이 오늘보다 낫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점점 회의적이 되어 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싸우고 죽여 왔는지. 그러면서 또 누군가는 살아남아 생명을 잇고,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죽는 게 무서워 신화와 전설을 만들고 마녀와 악마를 만들고, 끝없는 전쟁 전쟁 전쟁, 지금까지도... 오로지 먹고 살아남기 위해서. 지금의 현대인이 아무리 잘난 척 하더라도 결국은 '내가' 살아남기 위한 안간힘이라는 것을 왜 깨닫지 못했던가.
어렸을 때는 이런 내용이 내 마음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막무가내로 얼마나열심히 외웠는데. 왜 그렇게 싸우는지 이해도 다 하지 못한 채 참 열심히도 죽이고 죽으면서 전쟁을 하는구나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사람 목숨이라는 게 그렇게 하찮은 게 아닌데도 너무도 쉽사리 처리하는 것 같아 도리어 야만스럽게 여기기도 했는데. 이제서야 생각하니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가장 간절히 가장 어렵게 선택한 삶을 위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게 죽음에 이르는 길일지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의 삶을 위하여.
황제와 귀족과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펼쳐 나가는 흐름을 읽으면서 그 사이사이로 민중들의 삶과 죽음을 엿보았다. 내 능력으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짐작만으로도 충분했다. 스스로의 의지로 삶과 죽음을 조절할 수 있게 되는 사회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2000년 전 혹은 1000년 전보다 발전한 사회라고 할 수 있는가, 내 판단으로는 자신있게 그렇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 이 시선을 획득한 것을 깨달았다는 점이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보람이다.)
책에 따르면 서양인들은 십자군 원정 이후부터 해외 여행을 보편적으로 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서양인들이 해외 여행의 경험으로 인해 우리보다 더 나은 경험을 축적하게 된 것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에게는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이제 겨우 첫걸음인데.
나는 지금 좀 많이 혼란스럽다. 유럽이, 명확한 근거도 없이 무시해 왔던 유럽의 역사가, 갑자기 거대한 규모로 나를 향해 밀려온다. 이 책은 나를 한없이 주눅들게 했다.(y에서 옮김20100523)
<껌정드레스님, 고마워요. 그대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