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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옛 연인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8월
평점 :
나이가 들면 감정이라는 게 서서히 무뎌질 줄 알았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 또 싫어하는 마음이라든가 어떤 일에 쏟는 열정이라든가 지나간 일을 돌아보는 회한이라든가 등등. 그래서 삶이 한결 느긋해지고 자신과 남에 대해 더 너그러워지고 안달복달하거나 조바심을 내는 일 따위는 없어질 것이라 기대했는데. 아직 내가 이만큼의 나이에 이르지 못한 것인지, 시간이 더 많이 흐르면 이런 여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예측을 못하겠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은 나의 이런 기대를 미리부터 무너뜨려 주는 것 같다.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이를 더 먹는다고 아주 많이 먹는다고 해서 감정이 무뎌지는 그런 때는 오지 않는다고, 지금 가진 감정 그대로 어떤 경우에는 젊었을 때보다 더 짙게 품고 살 것이라고 말해 주는 듯하다. 감정이 신체의 나이에 따라 함께 늙어 가는 게 아님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된 것 같기 때문이다. 이건 좋은 걸까, 아닌 걸까.
이 작가의 장편소설도 좋았는데 단편소설도 좋다. 한 편 한 편을 장편으로 바꿔도 또 그것대로 좋을 것 같다. 읽는 마음이 더러 고단한 대목이 있지만, 나쁜 사람이 나오지 않아서 나쁜 상황이 펼쳐지지 않아서, 특히 내가 몹시도 싫어하는 학대받는 누군가(사람이든 동물이든)의 처지가 보이지 않아서 좋다. 어렵고 곤란한 지경에 빠지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없다는 게 아니다. 너무 끔찍해서 못 본 척하고 싶은 장면이 없다는 것, 이런 정도의 일이라면 가까이에서 흔히 볼 수 있을 정도의 고난에 해당할 것 같다는 것, 그래서 나에게 내 가족에게 내 가까운 이들에게도 일어날 평범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게 소설을 아주 친숙한 마음으로 여기게 한다. 흔한 소재 흔한 배경 흔한 인물들로 이렇게 매력적인 소설을 쓰기도 쉽지 않을 텐데.
책의 제목에 해당하는 소설(그의 옛 연인)이 내 마음을 가장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이가 들어도 감정이 늙어 해지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알겠다. 비록 몸은 느려지고 둔해지더라도, 그러다가 한 쪽씩 더 못 쓰게 되는 때가 되더라도, 감정은, 자신을 향하고 남을 대하고 상황에 대응하는 감정만큼은 지금의 내 것들과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작품 속 인물들 한 명 한 명이 내게 이걸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무언가 포기했던 것을 되찾은 느낌이 든다. 좋은 소설은 이래서 더 좋다. (y에서 옮김2021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