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 본 적은 없지만 젊어 본 적은 있다는 말처럼,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있다. 그 시절이 실제로 유복했든 남루했든 적어도 다시 떠올리는 기억 안에서는 대체로 아늑하고 흐뭇하기만 한 세상일 것 같기도 한데, 정녕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또한 생의 축복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리라 싶다.
이 책은 어른인 작가가 초등학생 때의 자신에게 말을 거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신선하고 또 애처롭다. 이렇게 이렇게 자라 이제는 어른이 된 자신에게 스스로 대견함을 느끼는 면도 있을 것이고 여전히 어떤 부분에서는 안타까움을 갖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그때와는 달라진 좋은 것들, 또 어린 시절과 다를 바 없는 여전히 모자란 내 모습. 사람은 변하기도 한다 싶어 들떴다가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못하는 거지 하면서 체념하게 되는 우울함까지 다 내 안의 모습이다.
작가의 추억 속에 있는 그림책 스무 권이 함께 등장한다. 쓸쓸하게도 이 가운데 내가 알고 있는 그림책은 한 권도 없다.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그림책 교류가 없었던 것인지, 이런 그림책이 우리나라에서는 출판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어렸을 때 그림책을 제대로 못 읽었던 것인지 그건 모르겠다.(아무래도 마지막일 이유가 가장 클 것 같은데.) 간접적으로나마 아이가 자라면서 책으로부터 받게 되는 영향이 어떠한 것인지를 고스란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림이 무서워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읽지 않았던 책, 그 그림이 아이의 영혼 한 부분을 건드렸다는 뜻이겠지. 그로 인해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자극을 받게 될 것이고. 사람을 좋아하거나 미워하거나, 어떤 동식물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어떤 음식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등등. 그러고 보니 내가 고양이와 개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된 이유가 갑자기 떠오르는데,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와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가의 개'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 읽으면서 느꼈던 무서운 기분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듯하니까.
작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기억력도 대단하게 여겨진다. 아무리 선택적 기억이라고 해도 이렇게 시시콜콜 건져 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애써 지웠던, 나의 어린 시절 씁쓸한 몇 장면을 떠올리면서 작가가 약간 원망스럽기도 했다. 굳이 이런 기억은 살려 주지 않아도 좋을 텐데 싶어서. 어린 마음에도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나의 소행들, 그로 인한 친구와의 갈등과 다툼, 부모님께도 숨겼던 나의 어긋난 양심 몇 쪽과 헛된 욕심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오글거리기도 하고 낯뜨거워지기도 하는 보잘것없는 자만심까지. 마음도 다치고 신뢰를 잃기도 하면서 자라왔겠지, 더 이상의 실수는 하지 말고 살아가자고 다짐도 하면서.
지난 날이 지금보다 더 좋았다고 회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때보다는 지금이 가장 낫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다행스럽다고 생각하는 점인데, 나는 지금이 내 삶에서 가장 만족스럽다. 예전에 나름 화려했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이 있다. 지금의 내가 초등학생 때의 나를 만나게 된다면 그때 이후로 잘 커 왔다고, 막연히 바라던 어른의 모습으로 살아 왔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고작은 흔들림은 있었지만 바라던 꿈의 길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고, 어렸을 때 느꼈던 갖가지 빈곤감은 서서히 지워 나갔으며,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오늘을 낭비하는 일은 없는 어른이 되었다고, 나 역시 작가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하는 말처럼 어른이 되어 좋다고.
가볍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다 읽었다고 가볍게 치울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어쩌면 작가의 어린 시절을 차지한 그림책 중의 한 권처럼 내게도, 어른인 나에게, 먼훗날 나이가 더 들었을 때 떠올리게 될 책 중의 한 권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할머니인 나에게 젊은 날의 나를 소환하는 기쁨이 되어 줄 테지. 이렇게 하여 마음 한 번 제대로 머문 책은 내내 사라지지 않게 되는 것이리라. (y에서 옮김2016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