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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럼 호텔에서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8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평점 :
한때는 이런 여행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지. 품격 있는 호텔에 머물면서 호텔 부속시설과 주변을 느긋하게 이용하고 관찰하며 누리는 시간. 지금은 딱 관심이 없어지고 말았지만.(난 여러 모로 우리집이 제일 좋으니까. 집 밖은 너무 위험한 세상이라.) 그래도 내 상상 속 꿈꾸던 여행을 아주 근사하게 체험하도록 해 준 작가의 이번 글은 추리나 범죄라는 장르와 관계없이 고마웠다. 이런 책 여행이라면 앞으로도 자꾸자꾸 하고 싶다.
마플 여사가 등장한다. 런던에서 떨어진 시골에 사는 나이든 마플 여사가 아주 어렸을 때 가 보았던 런던의 버트럼 호텔에 다시 가서 묵어 본다는 설정이다. 그것도 혼자서. 이건 상상만으로도 괜찮다. 노인을 위한 호텔 여행이라니. 우리 사정에서도 생각해 볼 만한 여행 아이템이 아닌가 싶다. 물론 당연하게도 코로나19 문제는 해결된 이후가 되겠지만.
마플 여사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사건이 자꾸 일어난다. 아닌 듯 관계 없는 듯 싶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건을 고리로 이어져 나온다. 마플 여사도 목격자로 연결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연히 사건 해결에 참여하게 되고. 이런 구성이야 배경이 굳이 이 호텔이 아니어도 또 호텔이라는 곳 자체가 아니어도 상관없으니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다만 버트럼 호텔을 묘사해 놓은 대목들이 끌린다.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런 근사한 곳이 있다고 하면 누구나 동경할 것 같기도 한데. 화려하고 호화로운 최첨단 현대식 호텔이 아니라 50년 이상을 거슬러올라가야 볼 수 있을 것 같은 전통 호텔이다. 그렇다고 고리타분하거나 낡았거나 우중충한 분위기가 절대로 아니란다. 시설이나 청결 같은 조건은 현대식 호텔과 다름없는데 인테리어 양식이나 서비스 태도나 제공하는 음식이나 디저트 같은 게 오랜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호텔이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이렇게 상상해 볼 수 있었다면 지구 위 어딘가에 고풍스러운 느낌으로 서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찾아볼 마음도 가 볼 마음도 없으면서 기대는 왜 하는지? ㅎㅎ)
작가의 책을 한 권 한 권 볼 때마다 계속 하는 생각인데, 100년 전 영국에서 있었던 어떤 현상이나 인간의 한계가 지금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읽히는 점이다. 변해야 했는데, 변하는 게 더 좋을 텐데, 여전히 같은 모습의 같은 한계는 절망스럽다는 느낌마저 준다. 사람은 정말 더 나아지지 않는 존재인 것일까? 착한 사람은 착한 대로, 나쁜 사람은 나쁜 대로, 순진한 사람은 순진한 대로, 교활한 사람은 교활한 대로......
기술은 재주에서 나오고, 품격은 성정에서 나온다.(남병철 「바둑 이야기」) 내 앞에 놓인 이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y에서 옮김2020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