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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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첫 시집이다. 첫 시집에서 이만큼의 느낌을 받고 나면 다음 시집이 기다려지는데, 괜히 내가 걱정이 된다. 적어도 이만큼이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이 시집을 읽으면서 내가 처음으로 받은 인상은 시인이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고 느낀 점이다. 보통 시집을 읽으면 시인의 독백을 엿듣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달랐던 것이다. 왜 이러시나, 왜 나에게 자꾸 말을 걸고 계시는 건가, 머뭇머뭇 물러서고 싶다가도 다음 말이 궁금해서 물끄러미 시인의 목소리 아래로 자리잡는 나. 괜찮구나, 혼자 떠드는 시인은 아니구나 했다.

 

가끔 이런 식의 말을 하는 자신을 본다. 다른 사람에게 보내려고 하는 말인데 하고 보면 나에게 되돌아오는 말, 듣는 사람은 무심히 듣고 넘기거나 의아해 하고 말 뿐이고, 나는 마음이 저려서 말하고 후회하고 말 못하고 후회하기를 잠시. 이럴 때 일상 언어가 아닌 시어로 바꾸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소원을 품기도 하고.

 

시인도 아직은 바라는 게 많아 보인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고 더 좋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시인이 그런 사람이 되어 준다면 나같은 독자는 더없이 고맙기만 할 것이다.

 

산문시가 많은 편이다. 나는 내 눈으로 끊어 읽어야 하는 산문시를 불친절하다고 느끼는 편이지만 이 또한 시인이 주는 요구 사항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한다. 호흡이 길어야 할 때도 있는 거니까. 

 

시집 끝에 있는 허수경의 발문은 덤으로 받은 귀한 선물이 되었다. (y에서 옮김20160223)

 

지는 해를 따라서 돌아가던 중에는 그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 - P26

변심한 애인들의 향기는 좋고 나는 살아서 나를 다 속이지 못했다라고도 말하기로 합니다 덧셈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 P30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 P40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 P49

강변에 텐트를 치고 누가 문을 열어젖힐까 걱정하면서 젖은 몸을 꼭 안고 저녁잠이 들고 싶었습니다 - P52

서로 다른 시간에서 유영하던 그림자들이 한 귀퉁이씩 엉키고 포개지는 일은 몸의 한기를 털어내려 볕 아래로 모이는 일과 같다 - P66

당신의 슬픈 얼굴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빛이 주저앉은 길 위에는
물도 하릴없이 괴어들고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 P79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 P82

한 이삼 일
기대어 있기에는
슬픈 일들이 제일이었다 - P96

해서 그쯤 가면 사람의 울음이나 사람의 서러움이나 사람의 분노나 사람의 슬픔 같은 것들을 계속 사람의 가슴에 묻어두기가 무안해졌던 것이었는데요

땅 끝, 당신을 처음 만난 그곳으로 제가 자꾸 무엇들을 보내고 싶은 까닭입니다 - P105

내가 연안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 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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