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은 낯설다. 낯선 것이 반갑다고 하면 진취적인 쪽이라고 하고, 낯선 것이 거북하다고 하면 고루한 쪽이라고 하려나? 나는, 이 시집을 읽고 보고 한 나는, 어느 쪽이라고 해야 할까? 스스로 생각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이 글을 다 쓰고 맺을 때쯤에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로서는, 허수경의 시를 읽을 때는, 시집의 형식이 어떠하든, 이를테면 가로책이든 세로책이든, 보통 시집보다 크기가 크든 똑같든, 여백이 많든 적든, 시의 길이가 길어서 에세이처럼 보이든 어쩌든, 시집의 형식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냥 시만 읽는다. 시만 읽기에도 벅차서 다른 시 바깥의 것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시집의 형식이 바뀐 것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시집을 하나 더 사서 봐야만 할 것 같다.
그녀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자꾸만 나를 떠나고 있는 나를 본다. 지금 여기 있는 나를 떠나서 과거 저 먼 곳으로 혹은 이 땅 너머 먼 곳으로 막무가내로 떠나는 나를 본다. 나는 그게 좋다. 그녀의 낯선 언어들 틈에 낀 채로 멀리멀리 가 보는 나, 거칠고 험한 곳과 지쳐 쓰러질 만한 곳과 가엾은 아이들이 울고 있는 곳과 춥고 어둡고 기분 나쁜 곳들. 현실에서는 내가 도저히 가 볼 것 같지 않은 곳들만 골라서 데려가는 그녀의 시어들.
그녀의 젊은 날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덕분인지도 모른다. 기억 속 젊은 그녀가 매혹적인 노랫말로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고 한들 내 기억 속의 그녀는 여전히 젊기만 하고 나는 이끌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옛날의 말투가 남아 있는 몇몇의 구절 앞에서는 변하지 않는 그녀를 확인하고 흐뭇해진다. 내 기억이 고마워서.
내가 시로 읽어내는 그녀는 그녀의 본질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다를 것이다. 내가 어찌 몇 편의 시로 그녀를 읽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생명, 아이, 생명의 탄생에 대한 간절함이 느껴진다. 전쟁이든 문명이든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슬픔의 근원들을 향한 그녀의 적의를 느낀다. 내가 읽어낸 그녀가 그녀의 작은 일부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잘못 읽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고.
시간이 바뀌고 다시 이 시집을 읽었을 때는 지금보다 더 많이 느낄 수 있기를. (y에서 옮김2011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