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과 교류의 문명사
주경철 지음 / 산처럼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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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와 낯선 곳에서 만나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저 사람은 나보다 힘이 셀까, 약할까. 저 사람은 나를 해칠까, 봐줄까. 내가 이렇게 생각하듯 저 사람도 이렇게 생각할까. 저 사람이 힘이 세면 내 것을 주어 달래고, 내가 힘이 더 세면 저 사람으로부터 뭔가를 받아서 경계를 늦추고, 우리는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이게 만남과 투쟁과 교류의 역사였던 것일까. 만나서 눈치 보고 싸우고 얻고 물러나는 되풀이. 


역사가 꼭 이렇게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 어찌 그리 만나면 싸우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식의 결론에도 이르게 된다. '신뢰'라는 감정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수준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 목숨에 대한 보장은 주어져야 생기는 감정일 테니. 


재미있게 읽었고 유익한 부분을 발췌했다. 이런 책을 읽고 나면 아주 흐뭇해진다. 꽤 많은 지식을 내 머리 속에 담아 둔 것 같고, 이 지식이 앞으로의 생활 곳곳에서 쓰일 것만 같다.(사실은 거의 다 잊게 되겠지만) 가끔은 잘난 척 하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y에서 옮김20150824)

인간이 지구 환경을 변화시켜가는 현상을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까?


두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다른 모든 생물종에 심대한 피해를 입힌다는 점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의 암세포와 같은 면이 있다. 그렇다면 지구의 자연환경이 건강한 상태를 회복하도록 인간이 자리를 비켜주어야 마땅하리라.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지구가 수많은 생물의 기계적 생멸만 거듭하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 문화가 연결되어 ‘의식’과 ‘정신’이 결부된 멋진 별로 탈바꿈한 것이 인간의 공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P27

여기에서 한 가지 고려할 일이 있다. 농경 사회로의 이행이 반드시 개선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석기시대 사냥꾼들은 신석기시대 이후 농경민들보다 대체로 더 잘 먹고 더 건강하게 살며, 식량을 확보해야 하는 시간도 더 적게 들어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실제 구석기인의 유골과 신석기인의 유골을 비교하면 평균적으로 구석기인의 키가 더 크고, 건강 상태도 좋았음을 알 수 있다. - P36

농경의 시작은 결코 단순한 과정이 아니다. 인구가 증가하고 획득 경제가 위기에 빠지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농경이 ‘발명’됐고, 한 지역에서 이루어진 방식이 전 세계로 확산됐다는 과거의 설명은 이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주 장기간에 걸친 유연한 과정이었고, 여러 현상이 복잡하게 얽힌 다면적인 현상으로 이해된다. 즉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기술과 문화가 오랜 기간 조정되고 발전하며 서서히 형성된 결과다. 결국 신석기 농업혁명이라는 용어 자체가 부정확하게 됐다. 그러나 그 결과가 실로 혁명적이라는 점은 여전히 타당하다. 인간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고, 역사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해 들어갔다. 인류는 찬란한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내부적으로는 통제와 억압, 불평등이 심화됐다. 그것이 꼭 행복으로 향한 길이었는가는 별개의 물음이다. - P42

유럽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쇠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사람의 입맛은 그토록 간사한 것인가, 이제 유럽의 소비자들은 단순히 쇠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부드러운 고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블링이 있는 꽃등심처럼 고기 사이사이에 지방이 들어가도록 하는 게 좋다. 그런 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일단 소들을 목초로 사육하다가 적당한 때부터 곡물을 먹여서 지방질이 늘어나도록 만들어야 한다. 때마침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는 옥수수 재배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옥수수가 남아돌아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옥수수를 소에게 먹이고 질 좋은 고기를 생산하여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 팔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쪽에서는 당장 사람이 먹을 식량이 부족한데 다른 곳에서는 엄청난 양의 곡물을 소에게 먹이는 기묘하고도 불합리한 일이 벌어졌다. - P53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이렇게 수출되는 고급 포도주는 오래된 포도주가 아니라 바로 그해에 만든 술이라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면 포도주 품질이 개선되는 게 아니라 대개 시어져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좋아진다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대부분의 백포도주 혹은 중급 이하 적포도주는 적정 시기가 지나면 오히려 품질이 떨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품질이 개선되는 것은 일부 고급 적포도주에만 한정된 이야기이며, 그나마 포도주를 병에 담가 보관한 이후의 일이다. - P113

20세기 후반부터 포도주의 생산과 소비는 이전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 변화의 바람의 근원에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해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칠레 등 이른바 ‘신대륙 와인’이 있다. 이 지역들은 새로운 소비층의 요구에 맞추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되 기계화와 생화학 발전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포도주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산지’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포도 품종을 내세우는 전략을 쓰고 있다. 이 방식이 극단화되면 미래의 포도주는 공장에서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예컨대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의 포도를 땅값과 인건비가 싼 나라에서 대량 생산한 다음 그 즙을 공장에 가지고 와서 정확한 효소를 집어넣어 발효시킴으로써 부르고뉴의 명품 포도주를 거의 그대로 복제할 수 있다. 코르크 마개가 점점 귀해지므로 거의 같은 효과를 내는 플라스틱 마개를 쓰고, 참나무통이 비싸므로 스테인리스 스틸 용기를 쓰되 그 안에 참나무 조각들을 집어넣어서 유사한 효과를 내는 식으로 변화가 진행 중이다. - P119

왜 정치권력이 성유물의 수집에 그토록 열심이었을까? 과거에 통치의 정당성은 종교적 성스러움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와 근대 초 유럽의 군주들이 가진 힘의 근원은 종교와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에 있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프랑스 국왕은 왜 국왕인가? 어떤 근거로 그가 프랑스 사람들을 통치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국왕이 신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나라 백성들을 다스리게 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프랑스 국왕은 대관식을 할 때 랭스대성당에서 도유식을 하는데 이때 왕의 몸에 바르는 기름은 성령의 비둘기가 직접 천국에서 받아가지고 왔다고 설명했다. 국왕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잘 지키기 위해 정치권력을 부여받은 하느님의 지상 대리인인 셈이다. - P136

우리는 바이킹을 전사, 해적, 모험가 등의 이미지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보다 낭만적인 측면은 떨어지지만 사실 이들은 상인으로서 더 큰 의미를 띤다. 아니, 그보다는 상업 행위와 약탈 행위를 동시에 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우리 생각에는 교역과 약탈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개의 행위지만, 과거에는 그 두 종류의 행위가 언제든지 병립 가능한 일이었다. 낯선 지역에 들어간다는 것은 언제 공격당해서 생명을 잃거나 상품을 빼앗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무장을 튼튼히 해야 했다. 그런데 이것은 정반대로 말할 수도 있다. 낯선 곳에서 내가 약탈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상대의 무력이 아주 약할 경우 언제든지 약탈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무력행사가 실익이 없을 경우에는 물론 적절한 교환 행위를 통해 서로 만족스러운 이익을 얻으면 된다. 이처럼 교역과 약탈은 사정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대처하는 두 가지 양식일 뿐이다. - P178

댐피어의 시대는 해적의 초기 전성기였다. 유럽의 해외 팽창이 절정에 이르면서 해적 역시 함께 성장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 점이 한 가지 있다. 우리말로 해적이라고 하면 완벽한 무법자로서 상대가 누구인지 가리지 않고 약탈하는 ‘날강도’를 연상할 것이다. 그런데 유럽 해적의 변천 경과를 보면 초기의 해적은 국가를 대리하여 적을 공격하는 무장 세력이었다. 다시 말해서 국가가 대적해야 하는 상대를 민간업자가 공격해서 그 자신은 이익을 얻고 국가로서는 적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얻는 것이다. 댐피어가 바로 그런 성격의 해적이었다. 그러나 다음 시기가 되면 해적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국이든 적국이든 가리지 않고 모든 배를 공격하는 완전한 무법자로 변한다. - P212

18세기는 또한 과학의 시대였다. 태평양이나 인도양 남쪽 바다는 아직 완전하게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으므로 이곳을 과학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각국에서는 과학이 국력과 직결되는 것으로 생각하던 때였다. 따라서 새로운 바다로 항해해가서 그곳을 소상히 관찰하는 것은 차후에 그 지역을 지배·정복하는 전 단계였다. 정치·군사적 지배와 과학적 ‘지배’는 병행하여 이루어졌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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