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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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가족의 비극 하나와 농담 하나를 이용해 만든 소설이라고 한다. 시작은 비극 하나, 농담 하나였겠지만 읽는 나는 작가가 확장시켜 놓은 세계에 반하고 말았다. 비극은 처절했어도 무섭지 않았고 농담은 경쾌했지만 진중했다. 내가 기대하고 응원하는 작가의 솜씨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여 퍽 흐뭇한 마음으로 읽었다.


우리 땅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하와이에 사진 신부로 간 젊은 여성이 있다.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남편이 될 남자는 이미 죽어버렸고 고난의 생은 계속된다. 소설은 이 여성의 생을 간접적으로 띄엄띄엄 보여 준다. 소설 속 각 장의 첫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부분의 자신이 쓴 책이나 인터뷰로, 남은 자녀들의 대화로. 읽는 입장에서는 좀 번거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내가 그랬다. 넘기는 책장은 책장대로, 소설 속 시간은 또 시간대로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과정을 몇 차례 되풀이하고, 제시해 놓은 가계도가 외워질 때까지 부지런히 확인해야 했으니까. 물론 나는 번거로움보다 호감이 점점 더 커졌으므로 읽는 즐거움이 더욱 늘어나고 있었고. 


이렇게 간접적인 방식이 아닌 직접적인 방식, 즉 주인공인 심시선의 생을 시간 순서로 펼쳐 보였더라면, 그래서 그녀가 겪은 무수한 고난의 삶을 충실하고 적나라하게 그려 놓았더라면,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끔찍하고도 지긋지긋한 배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더라면, 아마도 나는 이 소설을 대충 읽고 말았을 것이다. 그때는 그러했으려니 하면서. 작가는 이 대목을 드러내기보다는 숨기는 구성 쪽을 택했다. 대놓고 말로 전하는 것도 중요하고 의미있겠지만 말 너머 또는 말 뒤에 있을 의도와 진실과 바람의 힘과 가치를 체험해 보라는 듯이. 그리하여 작가의 의도에 뜻을 맞춘 나는 충분히 넘치도록 체험하고 읽어낼 수 있었다. 고단했던 평생의 삶, 살아남기 위해 갖고 있어야 했던 치열한 의지와 어떤 사람도 함부로 다루지 못하도록 자유로운 영혼을 지키고자 한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 주인공 심시선의 삶을 끌어모아 읽는 동안 나는 세상의 어떤 개인도 역사와 사회와 정치와 국가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가슴 아리는 체험이었다.     


소설은 심시선의 삶만 그리는 게 아니다. 심시선의 딸과 아들과 그들의 자손인 손자손녀까지 3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또 그들대로 자신만의 세상을 펼쳐 보인다. 이로움을 주는 면과 해를 끼치는 면까지, 저마다 처한 상황에서 맞는 세상의 정면과 뒷면과 때로는 납득할 수 없는 옆면과 숨겨져 있는 어둠의 저편까지. 나는 작가가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이어 놓은 세상의 여러 고리들에 감탄하며 읽었다. 이렇게 치밀하고도 밀도 높은 구성이라니. 우리 사회의 갖가지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들을 어떤 것은 돋보이도록 어떤 것은 슬쩍 지나가도록 또 어떤 것은 겹쳐 놓으면서 더욱 긴장하도록 각각의 인물들에게 배경으로 깔아 놓은 것이다. 어떤 사람도 소홀하게 읽지 말라며, 어떤 사람의 생도 그냥 넘기지 말라며. 우리는 누구나 이들 중의 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 셈이라는 듯이. 나오는 인물들을 모조리 좋아하는 마음으로 읽기는 이 소설이 처음인 듯 싶다. 


평범한 사람, 평범한 삶, 평범한 이야기가 얼마나 비범한 것인지 이제는 안다. 내 남은 생의 목표는 평범한 인생이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심시선의 가족 중 누군가는 항상 내 옆에 있어 줄 것만은 믿을 수 있어 괜찮겠다. (y에서 옮김2020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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