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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평점 :
두껍다. 시집인데 두껍다. 시집이라면 얇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가볍게 물리쳐 준다. 정확하게는 시선집이다. 작가가 평생 발표한 작품들 중에 골라서 모아 놓은 책. 실린 작품이 약 200편 가까이 되는데 작가가 뽑았다는 건지 번역가가 뽑았다는 건지 모르겠다. 몰라도 나로서는 상관이 없었고. 작가는 폴란드 사람, 노벨상을 1996년에 받았다. 앞서 어떤 책에서 이 책의 정보를 얻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그 사이에 잊었다. 이 또한 나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고. 이렇게 읽을 수 있으면 되는 셈이니.
나는 시집을 읽을 때면 시 전편보다 시 구절을 찾아서 옮기곤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이 일이 어려웠다. 너무 거대했으므로, 너무 많았으므로, 너무 하염없었으므로. 그래서 전편을 골라 옮겼다. 이 또한 만만하지는 않았다. 더 옮기지 못한 게 섭섭할 따름이다. 예전처럼 누군가와 이 책으로 모임과 토론을 하는 일이 생긴다면, 각자 마음에 드는 시 10편, 혹은 5편 뽑아 와서 이유랑 말해도 좋을 것 같다는, 이런 막막하고도 즐거운 생각도 해 보았다.
폴란드어로 쓴 시는 우리네 시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어떤 점이 다른지 살짝 궁금했다. 번역된 모습으로만 읽어서는 분명히 다 받아들이지 못해 빠뜨리는 것이 있을 텐데,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알아낼 방법도 없다. 그럼에도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먼먼 나라의 시 구절에, 시인의 호소에, 마음은 있는 대로 헝클어진다. 외국 시에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나는 좀처럼 갖지 못했던 일렁임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좋은 글은, 좋은 생각은, 위대한 사명은 이런 영향력으로 울려 퍼지는 것이로구나.
비유가 짙어서 어두운, 우리 작가들의 시 세계가 갑자기 떠오른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시, 소설보다 산문보다 더 가깝게 더 가볍게 여기면서도 결코 함부로 대하지 않을 점잖은 무게에 깃들이고 싶은 시가 그립다. 있을 것이다, 내가 아직 못 읽었을 뿐. (y에서 옮김20220201)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려나? - P24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 P34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내 소유는 아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기억으로 소유할 순 없다. - P79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단 한순간만이라도, 어디로 가는지 잊은 적이 있었던가? - P203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 P216
모래 알갱이는 보편적이건, 개별적이건, 일시적이건, 지속적이건, 그릇된 것이건, 적절한 것이건, 이름 없이 지내는 익명의 상태에 익숙하다. - P276
선한 인간은 독하지 못하고, 독한 인간은 선하지 않다. - P288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 P307
나는 너보다 더 오래 살았다. 이렇게 멀리서 네 생각에 잠길 만큼 딱 그만큼만 더. - P343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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