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사과의 주름살 문학과지성 시인선 191
이정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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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돌아보면 우리 주위에는 제 빛을 빛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들보다 빛은 커녕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물들이 더 많다. 조물주로부터 이른바 생명을 부여받은 것이나 그렇지 못한 것이나, 이름값을 얻은 것이나 이름값조차 지니지 못한 것이나, 어느 것이 더 귀하고 어느 것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할 수 없는 무수한 것들. 나는 이들 속에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특별히 더 나은 어떤 존재인 것처럼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얼마나 오만하게 다른 사물들을 거느리며 살아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이정록의 시집을 읽고 있으면 시를 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대신에 평소에 우리가 너무나 하찮게 여겨 왔던 것들, 심지어는 우리 주위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것들이 서서히 살아서 일어서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너무도 놀랍고 고마운 발견이다. 말없이 제자리를 지킴으로써, 남보란 듯 반짝이는 일 없이 묵묵히 제 노릇을 다함으로써 도리어 빛의 그늘이 되어 주고 있는 작고 소중한 것들이 시집 곳곳에서 나지막하게 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나라는 한 생명체가 살아가면서 이 넓은 세상에 무어 그리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서글퍼지기도 하겠지만 나에게는 그리 서운할 일이 못된다. 그저 이렇게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 해도 한 세상을 살아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넉넉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무언가를 이루어야겠다고 아둥바둥 하면서 제 삶의 진실을 놓쳐버리는 것보다는 소박하나마 제 자리를 잘 가꾸어나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친구들은 이런 내 생각을 한 마디로 촌스럽다고 말한다. 그릇도 작고 꿈도 작고 한 마디로 작은 우주 속에서 만족해 하는 나, 하지만 나는 나의 그 촌스러움이 마냥 좋다. 나의 그 촌스러움이 아주 반가워하며 만난 이 시집의 촌스러운 시들. 나처럼 어딘가에서 떠나온 고향을 그리듯이, 아직도 촌스러움을 품에 안고 있는 사람들이 이 시집에서 소중한 그리움을 찾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y에서 옮김20020213)

주름살이란 것
내부로 가는 길이구나 - P13

서해로 가는 약수물의 등허리가 비틀비틀 반짝거린다 - P24

모여 있어도
늙으면 외로운 것이다 - P54

뜨물 같은 마음들 모이고 모이면
줄거리 푸른 열무가 되어, 너른 바다로 간다 - P91

새의 발목에 악수를 건네는
솔 그림자처럼, 그대에게 가리라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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