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열린책들 세계문학 115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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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적 허영심을 꽤 높여 놓은 소설이다. 단 읽는 동안만. 다 읽고 나니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림도 체스도 바흐의 음악도. 소설이라도 남았으니 그나마 고마운 노릇이다. 스페인의 작가가 플랑드르 지방을 배경으로 500년 전의 그림을 소재로 쓴 추리 기법의 소설. 책장은 잘 넘어갔고 재미도 있었다. 마지막 장에서는 흠, 이러려고 그렇게 소란을 떨었나 싶어져서 아쉬웠지만. 

 

일단 작가가 여주인공을 너무 곱게 모시고 있다. 그림을 복원하는 능력도 탁월하고 예쁘기도 하고 일이나 관계에서 실수도 안 저지르고 인성까지도 좋아보이니 당연하기는 하겠지만 지나치게 귀하게만 대하고 있으니 이 점에서 통속적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등장하는 남자들이 모두 좋아라 하는 여자 주인공, 그래서 다들 도와준다는 설정, 끝까지 반전없는 여주인공의 행복. 이 점이 오히려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대목이다.  

 

혼자 미술관에 가 보는 일을 좀더 해 보아야겠다. 뭐가 뭔지 몰라도 동행자에 신경쓰지 않고 그림을 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제 와서 뭐하러 싶기도 한데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해 보는 거지 쪽으로. 책으로만 익힌 그림 감상 요령은 실제 그림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퍼즐을 맞추면서 생각한 건데 그림의 세세한 부분들에서도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심한 붓질마저 기막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으니까. 이제까지 모르고 살아 왔던 감동의 고리를 하나라도 더 얻는 일, 이게 남은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한다. 그래도 아니라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까지.

 

나는 체스를 할 줄 모른다. 보드게임에 흥미가 많은데 어쩐지 둘이서 승패를 가리는 게임들에는 흥미가 떨어진 편이다. 바둑이나 장기나 오목까지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체스의 원리를 설명하는 내용에서는 한 발 물러서 있었다. 서술을 따라 따지려고 하지 않고 그렇다고 하는군 하면서. 훌리아는 체스 게임도 이해를 잘 하더군. 

 

체스를 소재로 하는 그림들이 의외로 많이 보인 것도 신기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오래된 오락이었구나. 카드만큼이나. 체스나 바둑이나 장기가 전쟁과 밀접한 놀이이니 그에 따른 전략이나 지혜가 오랜 세월 이어져 왔겠지. 이걸 아는 작가는 아는 만큼 활용하여 글을 쓸 수 있는 것일 테고. 이 책을 젊었을 때 읽었다면, 어쩌면 나는 체스 게임판을 샀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니, 웃음이 나온다. 이제 나는 놀이도 가려서 도전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y에서 옮김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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