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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 윤대녕 대표중단편선 ㅣ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1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윤대녕의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간절해지는 순간이 있다. 집에 있는 책을 읽으면 되겠지만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새로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 본다. 이 책이 나온다. 반달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에게 없다. 실려 있는 소설 제목을 보니 낯익다. 출판사에서 작가의 대표작을 뽑아 엮은 책인 것 같은데 작품이 겹치더라도 이 책 또 가지면 되지 하는 욕심으로 구했다. 결과로 보면 잘 한 선택이다.
책에 실린 작품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옆에는 이 소설이 실린 것으로 내가 갖고 있는 책의 제목이다.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 - [은어 낚시 통신]
지나가는 자의 초상 - [남쪽 계단을 보라]
상춘곡
빛의 걸음걸이 - [현대문학상 수상작품집]
찔레꽃 기념관
탱자 - [제비를 기르다]
대설주의보 - [대설주의보]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 - [대설주의보]
반달 - [도자기 박물관]
세상에나, 두 편이나 나에게 없었다. 이 책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이 두 편은 못 읽었던 게 된다. 이제라도 이렇게 볼 수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의 몇 가지 되지 않는 수집 품목 중에 이 작가의 책이 있는 건데 놓치면 서운해서 안 되지. 문학수상집에 작가의 글들이 실리곤 하는데 그 수상집을 사지 않으면 특정 작가의 특정 작품을 얻을 방법이 없을 수도 있겠다. 이 점은 신경써야 할 사항이다.
오랜만에 읽어서 그랬던가, 낯익음과 낯설음이 거듭되었다. 익숙한 듯 와 닿는 문장들은 여전히 신비로웠고, 마음을 일깨우는 비유들은 보고 또 보아도 새로웠다. 급기야 나는 몇 줄을 옮겨 적어 본다.
- 안개 서린 저 고요한 빛의 잔주름 속에
- 어차피 모든 그리움은 상처의 원인이다. 나중에 상처로 변해 그리웠던 만큼 가슴에 남게 된다.
- 삶은 결코 후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 몇 년 전에 달 여행을 떠났다 방금 지구로 돌아온 사람 같았다.
- 북극에서 퍼 온 빙수를 온몸에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 그녀가 그예 맨발로 울타리를 넘어왔다.
- 봄비를 파뿌리처럼 하얗게 벗겨 놓고 있었다.
이제는 시도해 볼 수도 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만 진작 해 보지 못한 일이 후회스럽다. 이 작가의 글을 잘 활용하면 은유와 직유를 가르치는 데 퍽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아마도 나는 이 작가의 글을 나 혼자서만 보고 품고자 했을 것이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것을 누가 빼앗아 갈까 두려워 그러는 것처럼. 어리석게도, 이런 건 나누면 배가 되는 건데.
실려 있는 첫작품인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은 1993년에 쓰인 글이고 마지막 작품 '반달'은 2013년에 쓰인 글이다. 20년이 한 권에 담겨 있다. 나는 한 편씩 읽을 때마다 출간년도를 먼저 확인하고, 그 때 내가 어떤 처지였나를 떠올렸다. 1993년은 딸을 낳은 해였고, 젊었을 때였고, 그래서 또 그만큼 힘들기도 한 때였다. 이렇게 작품 하나와 내 시절을 비교하면서 2013년에 이르고 보니 묵직한 감회가 저절로 들었다. 어느 한때인들 소홀하지 않은 때가 있었으랴. 책을 덮을 때쯤엔 그만 울컥해지기까지 했으니 이게 무슨 일이람, 잠깐 당황했다.
모든 게 다 가을 탓이다. 이 작가의 글을 찾게 되는 것도 가을 탓이고, 까닭 모를 우울을 나무라게 되는 것도 가을 탓이고, 어지러운 나랏일에 짜증이 많이 나는 것도 가을 탓이고, 오늘 같이 맑은 날 수학능력시험을 치는 우리네 교육 현실이 불만스러운 것도 가을 탓이고,...... 무능한 자존심을 회복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읽어도 소설 속 인물들은 어찌 이리 한결같이 쓸쓸한 생을 견디고만 있으려고 하는 것인지. 나는 또 왜 이게 이리도 좋아서 잠기는 것인지. 그러나저러나 작가의 새 책은 언제쯤 선물되어 오려나. (y에서 옮김2018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