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가고 여름 민음의 시 313
채인숙 지음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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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을 때 내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골라 보는 재미가 있다. 이 시집, 대단하다, 나에게는. 거의 대부분의 시에서 얻는다. 좋은 느낌으로, 서글픈 느낌으로, 아득한 느낌으로, 슬픈 느낌으로…… 어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어떤 느낌들로. 


장마가 길어지고 장마 안에 파묻혀 있다 보니 이 시집 제목마저 절절해진다. 여름이 가고도 여름, 비가 내리고도 비, 장마가 간 뒤에도 장마일까. 날씨가, 기후가, 계절이, 사람 마음을, 사람 기분을 이렇게나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다니, 맑은 날이, 화창한 날이, 상쾌한 날이 무지무지 기다려진다. 


통영의 사량도에서 태어나 삼천포(지금은 사천시)에서 자라고,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살고 있다는 시인. 내가 알 만한 바다와 전혀 모르는 바다가, 내가 알 만한 여름과 전혀 모르는 여름과 함께 일렁인다. 신나는 여름 바다로 떠오르는 게 아니고 대체로 서럽다. 구경하는 바다가 아닌, 살아 남아야 하는 바다로 여겨져서 그런가, 나는 좀 심하게 이런 내 감정을 구박한다.    


그럼에도 사랑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떤 사랑인지 구체적으로 묻지 못하겠으나 짐작으로 충분하다. 사랑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면, 사랑이 아직도 그만한 힘을 갖고 있다면, 나는 사랑을 믿지 못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나무라지는 못하겠다. 뉘라서 사랑하는 마음을 멋대로 흔들 수 있을 텐가.


올 여름이 힘들다. 이 시집 덕분에 잠깐이라도 여름의 소용돌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되기를.(이 시집을 선물해 주신 woojukaki님께 고마운 인사를 전합니다.) (y에서 옮김20230717)



당신을 위해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했는가를 생각하는,
밤은 쓸쓸하다 - P17

삶이 아무런 감동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에
번번이 놀란다 - P19

왜 나는 이리 천천히 늙어 가는 것일까 - P21

나의 위로는 모든 당신이었으나
당신의 위로는 언제나 당신 눈물뿐이었다 - P23

당신이 없어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망고나무 그늘이 둥글게 자랍니다 - P25

독을 품은 마음이란 그런 것이지. 한때 내 팔 위에 앉아 쉬었던 새들을 향해 한 점 눈물을 뭉쳐 독화살 촉을 겨누고 말아. - P26

무언가를 오래 바라보는 것은 그것의 중심을 지키는 일이지 - P28

살아 본 적 없는 생은
여태 모두의 것이므로 - P30

밀려오고
스러지는 것은
파도의 일이 아니라
바람의 일 - P32

어떤 사랑도 다시는 나를 불러 세우지 말아다오 - P35

곧 허물어질 것들에만
생을 걸었다고 - P37

눈이 멀도록 저녁놀을 보리 - P43

시를 쓰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고 - P44

기이한 슬픔이 목울대를 치고 저녁 그림자가 초조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 P46

격자무늬 창문마다 다른 풍경이 저물고
여행 가방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우네 - P49

내가 당신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거리는
여기까지라고 - P51

언제쯤이면
당신과 나의 아득한 시차는
한 잔 술에 뒤섞여 사라지고 말 것인지 - P53

모든 이야기에는 먼지가 덮이기 마련이라네 - P60

본 적 없는 생을 붙들고 함께 우는 것 - P63

말하지 못한 것은
말할 수 없었던 것 - P65

가난과 고향을 팔아서 시를 적는 일이 지겨웠지만
가난하지 않은 시인을 여태 본 적은 없었다 - P71

너의 우주를 떠도는 별들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말고 - P74

마지막 인사는 짧았고 후련했다 - P78

낮은 파도가 밤의 팔뚝에 얼굴을 부빌 때
끝내 말하지 못하는 마음은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 P80

어디에도 내 방은 없지만
마음 얹힐 일은 아니지 - P82

나무는 맹목적으로 자라고
한때 내 사랑도 그러하였다 - P84

어떤 애타는 마음도 없이 여름을 지난다 - P86

길가 쪽으로 창문이 난 식당에서 우리는 다정하고 조금 수다스럽다 - P90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시는 희망이 있는 걸까요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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