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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평점 :
첫글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이 책이 내 취향일지 아닐지. 문장이 좋은 작가라는 말을 들었는데 어떤 경로로 그 말을 알게 되었는지 기억에 없다. 왜 지금까지 몰랐던 것일까, 진작 알았더라면 이렇게 좋은 글을 더 일찍부터 읽을 수 있었을 것인데. 작가의 생각과 문장 표현에 동시에 감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만족스러워하며 한 편 한 편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불문학자 김현 교수도 종종 떠올렸다. 오래 전, 꽤 찾아 읽었던 작가인데 두 사람 간에도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불문학자이면서 국문학에 대해서도 멋진 글을 보여 주는 학자들, 우리 사회가 이런 분들이 사소한 걱정 없이 학문 활동을 하는 문화를 조성해 주는 국가였으면 좋겠는데 독자로서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도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책이 작가의 첫 산문집이라고 한다. 문학비평서가 있는 모양이다. 내 의식의 품을 넓히고 채울 수 있도록 이 작가의 책을 더 읽고 새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y에서 옮김20160218)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 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 P12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 P21
이 유례없는 경쟁 사회에서 우리는 조금씩 지쳐 있다. 그렇더라도 마음이 무거워져야 할 때 그 무거운 마음을 나누어 짊어지는 것도 우리의 의무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듯이, 나라 잃은 백성이 독립운동하듯이. - P54
이런저런 사건들이 늘 ‘어느 날 갑자기’의 형식으로 찾아오는 곳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변덕스럽지 않기는 어렵다. ‘어느 날 갑자기’ 앞에서 놀라지 않게 하는 일은 인문학이 늘 내세우는 일이고, 사실 내세워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인문학이 미래학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닌 일, 언제 어디에 소용될지 모르는 일에도 전념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는 말이다. - P57
바닷가의 갯바위에는 이상한 이끼가 있다. 썰물일 때 뜨거운 햇볕 아래서는 줄기와 뿌리가 죽어 있는 마른풀처럼 보이지만, 밀려 온 바닷물에 다시 적시면 순식간에 푸른 풀처럼 살아난다. 지금 서울시는 서울을 디자인하느라고 바쁘다. 그 디자인이 기억의 땅을 백지로 만들고 통속적인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이 아니기를 바란다. 마른 기억의 이끼를 싱싱한 풀로 일으켜 세우는 밀물이길 바란다. - P60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는 잘 만들어진 실패담이다. 성장통과 실패담은 다르다. 두 번 다시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늘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아름답고 거룩한 일에 제힘을 다 바쳐 실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일에 뛰어드는 것을 만류하지 않는다. 그 실패담이 제 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하였다는 승리의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날은 허망하게 가지 않는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것들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찾아오라고 말하면서 간다. - P88
문제는 잔인함이 아니라 그것을 생각해 내고 설득력 있는 영상으로 옮겨 놓을 수 있는 상상력의 튼실함일 것이다. 잔인성이건 다른 것이건 간에, 우리 안에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어떤 괴물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끌어내어 보여 줄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주체의 역량이기도 하다. - P90
저 높은 크레인 위에 한 인간을 1년이 다 되도록 세워둔 것이나, 그 일에 항의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학교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 P115
국제 외교나 통상에서 그때그때마다 현행의 잣대에만 매달리다 보면 우리 같은 처지의 국가들은 늘 한 걸음 뒤지게 마련이다. 그 잣대의 향방을 예견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파악하고 그 고향을 아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구미 제국’을 공부할 때, 그 고대와 중세를 더듬어 그 잔뿌리까지 남김없이 캐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도 하겠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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