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577
박라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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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경우, 이어지는 독서에서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방해가 되기도 한다. 이 작가의 신춘문예 데뷔작인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겹치는 게 성가시다. 이건 내 독서에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이 시인을 알고 난 후로 세월은 제법 흐를 만큼 흘렀고, 작가의 글에 대한 내 기대감은 전혀 낮춰지지 않은 상태라 계속 찾아 보고 있다. 평강공주를 떠나 보내지 못하는 것은 아무래도 내 쪽이겠지? 


시를 읽는 마음이 외로워지지도 고달파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신이 나는 것도 아닌 상태, 무료하다는 느낌에 머문다.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이 되고 만 탓인가. 내 마음이 건조해진 탓인가. 산문시 형태의 배열도 익숙함을 지나니 다른 맛이 안 난다. 

좀 어려웠고 문장과 문장 사이, 낱말과 낱말 사이가 멀어서 내가 읽는 걸음 폭으로는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앞 행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시를 놓아 보내기만 했다.    


그래도 얻은 몇 행 덕분에 영 아쉽지는 않다. 다시 끄집어 내어 읽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y에서 옮김20240831) 


못 가본 세계에 발을 얹을 수 있다면 한 번은 얼어야만 사람도 꽃을 피운다면 얼어볼래! 툭툭 고단한 씨앗들 미래를 열 수 있도록 - P16

한 시절 너의 배는 꽃밭이었는데 - P27

늙는다는 것은 물이나 공기의 두께로
얇아지는 새벽이 오는 거 - P32

너 웃는 거 한 번 더 보려고 차린 가을 밥상 깍두기와 백합구이 백합탕 낙지구이 갈치구이 초장 옆에 생굴 다소곳이 앉아 있게 했던 거다 - P35

한 사람을 깊이 안다는 것은 한 봉지의 향기이거나 마약을 곁에 두는 일인 것도 - P40

상처가 노을의 일부인 줄 몰랐을 때
그의 시간 속에 붉은 노을 스며들 때
남남인 어제의 아픈 고백들이 흘러들어와
조금은 더 붉게 붉어졌다 - P119

덜 달고 덜 눈부시면 덜 열매 맺고 덜 연연하면 되잖아!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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