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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의 순례자 ㅣ 캐드펠 수사 시리즈 10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0월
평점 :
종교는 갖고 있지 않지만 종교의 원리나 종교인의 양심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지 않는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 덜 떨어진 사람이 있을 뿐, 악에 유혹되는 가여운 영혼이 있을 뿐. 사람이 문제인 것이지 과학처럼 종교에는 잘못이 없는 것일 테니까.
중세 잉글랜드의 수도원이 배경. 나이 들어서 수도사가 된 주인공이 활약하는 소설.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당시 살았을 사람들의 삶과 갈등과 사랑과 용서를 상상으로 재구성하여 보여 주는 소설이다. 아주 재미있다. 시리즈를 이어갈수록 더 재미있다. 등장인물들이 고리에 고리를 물고 인연을 쌓아가는 장면을 확인하는 일도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만큼이나 흥미롭다. 각 권에서는 독립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지만 인물들의 관계를 고려하면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번 권에서는 고행의 순례자가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왜 고행을 하면서 순례를 하려는 것인가. 순례 자체에 종교적 관심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더더욱 의아한 장면인데 캐드펠 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끝내 밝혀낸다. 그 이유를 알고 난 후에도 내가 순례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종교인이 될 자질은 아주 없는 게 분명하고. 그게 뭐지? 그런 것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길이 된다고? 아무리 종교가 마음을 진정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는 해도... 소설은 재미있게 읽고 있으면서 종교 대목에서는 계속 삐딱해져 있는 채로.
스티븐 왕과 마틸다 황후가 왕권을 잡기 위해 싸우는 내전 중인 잉글랜드. 스티븐 왕의 부인 이름도 마틸다라 마틸다 왕후와 대비하여 부인은 왕비 마틸다로 부른다. 나는 소설을 읽다 말고 자꾸 이 시기의 역사를 살핀다. 실제와 허구가 어떻게 맞물려 펼쳐지고 있는지를 짚어보고 작가의 역량에 계속 감탄하면서.
글의 맨 마지막에서 캐드펠이 휴 베링어에게 건네는 진실이 대담하다. 출생의 비밀이란 이야기라는 장르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이 대목만큼은 너그럽게 이해한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