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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산책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8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2월
평점 :
시의 상상력은 소설에서 보여주는 상상력과 어떻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리듬인가, 통통 튀어오르는 시적 언어의 리듬감. 같은 상상력이라는 말에 있어서도 그것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은 신선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렇게 어려웠지만 이 시집을 깊이 읽었다.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잔가지들이 무수히 많고 본줄기도 가늘다/하늘은 그들의 부엌/오늘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그리고 봄기운을 두 방울 떨군/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씹는 것이다(34p에서)' 이 시를 지나갈 때 내 가슴에서 쨍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 시집에서 나는 시인의 나이도 엿본 것 같았다. 세월의 한가운데를 돌아서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느껴졌다. 더이상 젊지 않을 것 같은 나이, 더 이상 푸른 꿈 때문에 좌절하거나 솟구치거나 할 것 같지 않은 나이. 조금은 쓸쓸하게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 싶었으나 여태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것들은 아쉬움 속에서도 돌려보내 주고. 내가 나이를 먹고 늙는다면 이렇게 되었으면 좋으리라 싶은 그런 모습을 하고서. 어쩌면 이것은 순전히 내 느낌만일 수도 있다. 시를 통해 만난 나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이제는 우울이 그리 슬프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많이 살아온 기분이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만도 아니고, 삶이 행복한 것만도 아니고, 사람이 사랑스러운 것만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살고 싶고 행복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것. 그런 날이 올 것을 확신할 수 없어도 그래서 심지어는 '영락이라는 말은 슬프다...영락한 것 같다는 말은 슬프다(16p)'고 생각은 하면서 그래도 그 슬픔이 그리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것. 나는 시집이 마음에 들었다. (y에서 옮김2004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