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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평점 :
나는 이런 책을 읽으면 유익하지만 재미가 있는 건 아니라고 먼저 쓴다. 읽어야 할 책이기는 하나, 마냥 즐겁고 신나서 어느 새 다 읽어 버렸군 하는 책은 아니라는 뜻이다. 좀 알고 있는 내용을 만나면 스르르 읽어 넘기기도 하지만 대체로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밖의 지식이 많은 탓에 쉽게 넘겨지지가 않는다. 그러다 어떤 대목에서는 거듭 읽어야 하기도 하고, 읽어도 끝내 내것이 되지 못할 부분들은 속절없이 넘길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니 좀 수고를 기울여야 하는 독서가 되는 거다. 그래도 이 작가의 글이라면 이만한 수고쯤이야 기꺼이 해야지 하는 마음이 든다는 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역사에 대해 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책을 읽고 내가 그만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잠시 난감했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마구 공부해야지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고, 이만해도 모르는 것보다 나았으리라 싶지만 진작에 책 좀 더 읽고 공부도 해서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정도의 아쉬움 같은 것이었다. 작가가 소개하는 책들이 한결 친숙하게 와 닿았으면 흐뭇했을 텐데 싶은 정신적 허영심이 채워지지 않은 기분은 남았지만 이제 와서 더 이상 뭘 하겠다고 하는 정도의 내려놓음이라고 할까. 꼭 알지 못하더라도 내 생활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는 영역이지 싶어 쉬운 포기였을 수도 있고.
그래서 나는 역사의 역사를 풀어 주는 작가의 전문적인 설명 대신 역사를 통해 경고하는 작가의 말 쪽으로 내 관심을 돌렸다. 어쩌면 이게 역사를 아는 것보다 역사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더 적절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고. 또 이게 내가 좋아하는 방식의 글읽기이기도 하고.
다음은 내가 이 책에서 고른 내 마음에 남은 문장들이다. 나는 하지 못하는 말이지만 좋다고 느낄 줄은 아니까 옮겨 본다. 다른 책을 읽을 때는 그저 옮기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문장마다 내 느낌을 풀어 글로 써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또한 역사를 조금 더 잘 이해하는 방식이 될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에서.
| 5쪽 어떤 대상이든 발생사를 알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
여러 번 느낀 점이다. 무언가를 알고 싶을 때, 그 대상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알게 되면 훨씬 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하다못해 사람도 그랬다.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그걸 알면 그가 지금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는지까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역사라고 다를 게 있겠는가. 작가가 서문에 써 놓은 이 자연스러운 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특히 유의해야 할 사항이라고 해 주고 싶다.
| 14 역사는 '인간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에 관해 문자로 쓴 이야기'다. |
작가는 책의 초반에 역사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정리하고 글을 전개한다. 역사가 기록이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만 이야기라고 하는 말은 낯설어 잠시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그런데 곧 납득하고 동의했다. 오히려 이야기라고 하는 데에서 신선한 매력까지 느껴졌다. 역사를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니, 진작 이 관점을 알았더라면 나는 역사와 훨씬 더 친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객관적 기록 혹은 지난 과거에 대한 정보로서 모두 외워야 하는 대상이었던 것이 내게 역사였으니 나는 역사 공부에 꽤 고달픈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 14 역사가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역사에 대한 도덕적 감정을 텍스트에 투사하며, 독자들은 그 감정을 느낀다. |
도덕적 감정, 좋은 말이다. 중요한 말이기도 하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없어서 엉망진창이 된 과거의 역사가 얼마나 많던가. 당장 겉으로 드러나는 힘은 없어 보여도 안에서 끝없이 흐르고 있는 삶의 바른 지침이나 방향 같은 것, 거기에 도덕적 감정이 담겨 있어야 올바른 역사가 되고 독자들도 마침내 그런 역사를 지켜 나가게 될 것이라고. 아닌 건 분명히 아닌데도 아집이나 분노로 엉터리 역사를 붙잡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 지성의 한계를 느끼고 만다.
| 16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는 데서 출발해 과학을 껴안으며 예술로 완성된다. |
이 문장을 옮기면서 나는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내 의식이 이 문장의 도움으로 한 단계 올라선 듯하다. 이 문장이 가리키는 바의 역사 이야기를 오래오래 읽고 싶다.
| 52 국제전이든 내전이든, 폭력을 동원한 집단적 충돌은 모두 인간의 능력과 사회 조직 사이의 부조화 때문에 일어난다. |
과거의 역사를 읽다 보면 전쟁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싸움만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아니 싸우면서 살아 남은 자들만 살았다고 해야겠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간보다 급격히 축약된 형태로 읽다 보니 더욱 싸움이 잦았던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왜들 그렇게 싸우는지에 대해 다른 책을 통해 답을 얻어 보려고도 해 보았는데 이 문장이 강한 울림을 준다. 아직 우리가 부족한 능력의 인간이어서 그런 게 아닌지, 우리가 좀더 성숙해지면 싸움이라는 게 줄어들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 65 인간은 이성을 가졌지만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사회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제 어디서나 모순과 부조리가 넘쳐 나며, 개인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행운과 불운에 흔들린다. |
몇 천 년 인류 역사에서, 사람의 본성이 별로 바뀌지 않았다거나 인간 삶의 모습이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고 느꼈던 내게 상당한 무게로 다가온 문장이다. 그랬던가, 그랬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 하는 안타까움이나 속상함이나 무기력감이나 때로는 대상 없이 향하는 분노에 이르기까지 역사 앞에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절망했던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이 절망을 넘을 수 없다는 게 여전히 답답하기는 하지만 이만큼에 이른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 276 역사는 인간의 상충하는 본성이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역사와 인간 본성과의 관계를 비로소 짚어 보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아마도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되풀이되는 역사라는 것들이.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깨달음을 얻었다면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하고 비슷한 실패를 안 할 수 있을 텐데, 거듭되는 실수나 실패가 생기는 원인이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시대에 따라 달라 보이는 환경에서 인간 본성은 여전한 모습으로 서로 충돌하고 서로를파괴시키려고 했으리라는 것을. 어리석다고 할 수밖에 없는 건데, 이 또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읽었을지도 모를 이 책, 그래도 나는 좋았네. (y에서 옮김2018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