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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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더뎠다. 낯선 이름들에서 자꾸 걸렸다. 사람 이름, 장소 이름, 직책 이름, 직업 이름 등등. 읽기만 하는데도 이만큼이나 걸리는데 이름 하나하나를 지어야 했던 작가는 얼마나 수고스러웠을까. 괜히 쓸데없이 걱정이 되었다. 아닐 것이다, 모름지기 창작은 이름 짓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테니, 작가는 충분히 즐거웠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읽어 나갔다. 점점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소설 속 이름들에 친해지면서 낯설기만 하던 상황도 급격하게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없는 공간, 그런데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공간과 사람들, 또 괴물과 성스러운 존재들. 세상에 없는 이곳으로 독자가 가 보고 싶도록 만드는 게 SF 작가의 능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내 취향의 소설이 된다. 이 작가의 작품은 늘 내 취향이다. 나는 윤해와 달낙현이 말을 타고 다니던 그 초원에 가 보고 싶어진다. 거문담을 가까이에서 구경하고 싶어진다. 무섭기도 하지만 궁금한 마음이 더 크다. 


없는 시절, 없는 때, 없는 사람, 없는 이야기를 되살리는 일. 작가는 내놓고 독자는 받아 안는다. 내 앞에서, 글 안에서 우주 하나가 새로 생기는 듯한 기분이 된다. 작가도 나도 조물주가 된 것 같다. 만들어내는 일의 가치와 보람을 알고 나면 알기 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작가의 도움으로 내가 만들어내는 세상은 또 얼마나 많고 다양한지. 


현실이 고단할수록, 현실이 지긋지긋할수록 나는 SF 소설에 기댄다. 적으나마 힘을 얻는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것,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세상에는 많고 많다는 것, 스스로의 힘든 생을 바꾸어 다른 이와 더 나은 모습으로 나누는 사람도 있다는 것, 고마운 예술가들, 고마운 창작자들, 고마운 SF 소설가들.(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고는 있지만)   


기병과 마법사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과정이 소설의 초반 과제다. 읽어 가면서 두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중반의 과제다. 결말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좀 실망했다. 나는 다른 결과를 상상하고 있었다. 내 안의 문을 열 줄 아는 마법사라면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여럿 세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혼자 구시렁거렸다. 마법사를 연모하는 기병은 오래 그리울 듯하다.


어슐러 K. 르 귄의 어스시에 등장하는 마법사가 떠올랐다. 마법사라는 직책이 이렇게나 고단한 삶을 버텨야 한다니 전혀 부럽지 않았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었겠지만. 세상에 부러운 사람, 부러운 삶은 없는 셈이다. 지금의 나, 이것만큼 환상적인 존재감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적극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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