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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시리즈 세트 - 전4권 ㅣ 유산 시리즈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0월
평점 :
이렇게 빨리 읽어버릴 줄 몰랐다. 다 읽기까지 시간이 걸릴 듯했는데 도중에 다른 책을 잡을 수도 다른 일을 할 수도 없게 했다. 이 작가가 만들어 보여주는 상상의 세계는 내게 퍽 매력적이다. 나는 다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가가 하는 이야기라면. 세상에는 신도 있고, 신이 인간과도 악마와도 같이 살고 있고, 서로서로 사랑도 하고 질투도 하고 원망도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고.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신이나 인간이나 악마나 다 거기서 거기인 생명이겠지만(신도 죽으니까).
1권 2권의 주인공은 인간이었고 3권 4권의 주인공은 신이었다. 나는 인간인지라 1,2권에 더 몰입했고 3,4권에서는 다소 거리를 둔 채 읽고 있다고 여겼는데 다 읽고 나니 4권 마지막에서는 완전 빠져들고 말았다. 신이 인간이 된 것인지 내가 신이 된 것인지, 아무튼 우리는 만났고 함께 했고 함께 마쳤다. 여운이 짙다. 이래서야, 당분간 나는 내 주위에서 신들의 속삭임을 느끼고 있을 것만 같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새벽이 올 때마다. 어린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웃을 때도 장난을 칠 때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쁜 사랑을 하고 있을 때도.
재미있었고 중간중간 끔찍하기도 했지만 잘 넘겼다. 철없는 신들이 그렇지, 실망도 했지만 그래서 더 가깝게 느꼈다. 세상에는 영원한 존재, 완전무결한 존재가 없을 것 같다. 변화가 핵심이므로, 모이고 흩어지고 만들어졌다가 부서지고 만났다가 헤어지고 살고 죽고. 그러니 변한다는 것만 영원한 셈이다. 지금은 이 모습으로 다음에는 다른 모습으로. 그리고 우리는 이전의 삶을 모른다. 모르고 살고 모른 채 죽는다. 긴 듯 싶어도 짧고 짧은 듯 싶었는데 한없이 길게 느껴지고.
내 힘으로는 도저히 나아갈 수 없을 광대한 범위의 배경 안에서 놀랄 만큼 깊고 높은 이야기를 만나 놀다 보니 괜히 내가 크고 넓어진 기분이다. 바깥 세상이 내가 바라는 기대대로 흐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조차 더 밖에서 보니 납득이 되기까지 한다. 그래, 누군가에게는 저렇게 누추한 매달림도 생인 것이다. 각자만의 삶이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살다가 죽을 수밖에. 내가 나를 안타깝게 여기지 않도록 돌볼 수 있을 뿐.
맥빠진 채 보낼 것 같았던 올해 2월의 절반을 이 책으로 살았다. (y에서 옮김2025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