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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왕국 ㅣ 유산 시리즈 2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0월
평점 :
아주 몰입해서 읽었다. 상상소설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현실같았다. 신도 있고 인간도 있고 악마도 있고 이들끼리 사랑도 하고 아이도 낳고 질투도 하고 죽이기도 하면서 살고 있는 세상 이야기. 신도 죽는구나, 이렇게 하면. 사람이 신을 살리기도 하는구나, 이렇게 하면. 악마가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존재일 줄이야, 새로 봐야겠다, 아는 악마 하나 정도 있었으면 좋겠구나.
소설은 앞선 책 십만왕국을 잇고 있다. 십만왕국의 주요 인물들이 신이었다면 이번에는 신들과 가깝게 지내는, 절반의 인간 오리다. 오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마법이 일어나는 장면은 보이는 눈을 갖고 있다. 그래서 신을 본다. 신이 움직이는 자취도 보이고 신들이 활동하는 무대도 보인다. 무엇보다 신에게 가는 길도 안다고 볼 수 있겠다. 장님이면서 그림을 그릴 줄 알고 이 그림으로 길을 열었으니. 대단하면서도 촘촘한 상상력. 빈틈을 찾아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오기가 일어날 정도로 꾸며 놓았다. 찾아내지 못하고 말겠지만.
신들이 인간처럼 피를 흘린다는 설정은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이 피흘림이 이번 소설의 주요 소재라 글 전체에 낭자했다. 글로만 보는데도 얼마나 끔찍하고 화려하기까지 한지. 영상이라면 나로서는 못 볼 장면들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하고 있다는데 영 못 볼 것 같다. 아무리 아름다운 피흘림이라고 해도.
빛의 신은 낮 담당, 어둠의 신은 밤 담당, 새벽과 황혼을 담당하는 회색의 여신. 주신 셋. 셋이라는 설정도 이들의 각 역할도 신통하기 짝이 없다. 완전한 상상력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완벽한 채움, 무한 공간과 시간, 셋 중 하나가 빠졌을 때 일어나는 대혼돈, 셋이 서로를 헤아리고 유지하는 균형감. 3이라는 숫자가, 이 숫자가 가진 속성이 무서워졌다. 나는 그게 무엇이든 셋을 갖고 싶지 않게 되고 말았다. 하나를 버리든가 하나를 더 구하든가, 그래야만 될 듯하다.
재미있다. 신을 믿지 않고 있어서 신이 더 하찮아 보이고, 인간을 믿지 않고 있어서 인간이 더 위대해 보인다. 어쩌면 신과 인간은 인간의 다른 두 모습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더 나은 인간과 덜한 인간, 더 강한 인간과 더 약한 인간, 더 자라는 인간과 쪼그라드는 인간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신 그까짓 거, 이 소설을 읽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인간이다. 책 안에 나오는 필경사라는 이들이 위험한 친구로 보였는데 모처럼 나도 위험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정성들여 읽고 하찮게 쓴다. 아무도 모르게 필경사가 되어 가고 있어도 좋겠다.(y에서 옮김2025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