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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시의 이야기들 ㅣ 어스시 전집 5
어슐러 K. 르귄 지음, 최준영.이지연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8월
평점 :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면. 작가는 작가니까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낸 것이겠지만 독자인 나는 그 상상의 시작만으로도 벅차다. 감히 내게 그런 상상의 힘이 있을까 싶은 마음이 아주 크기도 하고.
이 책은 앞서 읽은 4권의 흐름을 따라 잇는 내용은 아니다. 이 내용은 다음 책인 6권에서 이어지는 모양이다. 이 책에 실린 5편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이를테면, 큰 점 사이를 소소하게 잇는 작은 점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해야겠다. 작가가 창조해 놓은 어스시의 세상에서, 이미 이야기해 놓은 것들 사이에 있으면서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큰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는 그다지 영향이 없으나 알려 준다면 조금 더 친밀하게 다가설 수 있을 만큼의 작으나 깊은 이야기들. 마치 우리네 왕조 중심의 역사 사이에 이름을 알리지는 못했으나 제 몫을 다하고 살았던 서민의 이야기처럼.
때문에 나는 이번 책을 앞서 읽은 책들보다 훨씬 더 애틋하게 읽었다. 작가가 이렇게나 세심하게 낱낱의 사람들을 신경쓰면서 만든 세상이 어스시로구나. 앞서서 또는 위에서 큰 힘을 갖고 이끌어 나가는 입장의 인물들 말고, 뒤에서 또는 숨어서 아니면 있어도 있는 줄 모르는 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주인공으로 만들어 내는 솜씨, 이건 솜씨를 넘어 탁월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위대한 마법사만, 위대한 왕만, 위대한 용만 위대한 게 아니라는 것을, 하찮아 보이는 마녀도 하찮아 보이는 목동도 심지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과일나무 한 그루조차 제 몫의 생명으로서의 역할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니까. 아니다, 생명을 갖고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시냇물도 우물도 돌도 언덕도 다 거기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 세상은 이러한 곳이라는 것을 느끼자 저절로 겸손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중요하기는 해도 나만이 세상의 중심은 아니라는 말인 것이다. 내 욕심을 위해 나 밖의 그 무언가를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에게 저마다 꿈꾸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는 주문을 한다면 과연 어떤 세상들이 펼쳐질까? 누군가는 자신이 신이 되는 상상을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자신이 왕이 되는 상상을 하기도 하겠지.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잘 사는 세상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그게 상상 속에서라도 가능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항이 한 가지 있다. 진정한 마법사가 되는 게 쉽지 않다는 점. 너무너무 고되다는 점.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무엇보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사항을 외워야 한다.(외울 줄 모르면 마법사가 되기 힘들다. 그래서 가짜 마법사가 또 생겨 나기도 하고.) 나는 이제 진정한 힘을 지닌 마법사를 존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설 속 이야기라도. 이 책 덕분인 셈이다.
6권 남았다. 아껴 읽으려고 한다.(y에서 옮김2020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