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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한국어 ㅣ 오늘의 젊은 작가 30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0년 11월
평점 :
인류가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다른 동물과 차별되어 발전해 왔다고 하는데, 이 의사소통 수단 가운데 언어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텐데, 우리에게는 한글이라는 독창적인 문자도 있는데, 그럼에도 언어를 포함한 의사소통 때문에 빚어지는 갈등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의사소통 수준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면 갈등은 덜했을까? 아니면 인류의 발전이 없었을 테니 동물 중 한 종으로 살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이 글도 쓸 수 없었을 테니 배부른 혹은 배고픈 생명체 중의 하나였을까? 약간 짜증이 나는 이 물음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소설 속 화자의 이름과 일치시켰다. 소설인데 소설이 아닌 글로 읽을 수도 있겠다. 오해도 독해 능력이니 어쩔 수 없겠고 작가의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분리해서 읽는다. 작가는 작가, 화자는 화자. 뉴욕에서의 작가의 경험이 글 속에 녹아 있겠지만 현실과 따로 읽는다. 소설과 현실이 일치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분리되는 것도 아닌 이 모호한 경계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게 마음에 들었다면 퍽 만족스러웠을 텐데.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해 본 경험이 있다. 봉사 차원이었고 내가 사는 곳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일이었기 때문에 소설 속 화자의 처지와는 아주 다르기는 하다. 나는 보수도 없어서 쉽고 단순하게만 해도 서로에게 괜찮았지만 화자의 대학 강의는 책임이 주어지는 일이었으니까. 내가 이 일을 오래 하였다면 화자와 비슷한 고민에 이르지 않았을까, 막연하게 짐작하는데 금방 그만둔다. 앞으로는 안 할 일이니까.
말을 가르치는 일은 문화와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기도 하다. 보조사 하나, 어미 하나에도 의미가 달라지므로 간단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도전해 볼 만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인사말만 해도 얼마나 복잡한가. 높임법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과의 관계에서 어긋나는 화자의 상황에서도 우리말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같은 말을 한다고 오해가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고 같은 표현을 한다고 다 이해해 주게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는 어쩌면 저마다의 이익과 생존에 기반해서 살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말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공부를 하고 의견을 나누고 대책을 함께 찾으려고 하는 것일지도. 그나마 말로 하는 게 비교적 쉽고 해결책에 가까울 테니까. 작가의 <중급 한국어> 책이 나와 있다. 더 들어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