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사정 - 조경란 연작소설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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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사정이라는 말은 참 서럽고, 또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좋을 때는 잘 안 쓰게 된다. 뭔가 잘못되었을 때, 변명이 필요할 때, 속셈을 숨기고 싶을 때, 더 이상 알려주지 않고 싶을 때 하게 되는 말, 가정 사정으로 어쩌고저쩌고. 가정 사정은 가정의 숫자보다 훨씬 많을 테지. 가정에 속해 있는 사람 숫자보다도 많겠지. 그 사정이라는 게 혼자의 것일 수도 있지만 둘 이상이 엮였을 때도 생기게 마련이니까. 소설집은 제목부터 암담해질 것을 각오하도록 일러 준다. 그 암담함을 읽어야 하는 것이 독자로서 해야 할 몫이고. 


평화롭고 안온하며 하는 일마다 잘되는 가정의 이야기는 소설 재료로 적당하지 않다. 소설 속 인물들은 다들 좀 아프고 좀 못났고 좀 딱하고 좀 민망해서 읽고 보는 마음이 편하지 않게 마련이다. 어쩌면 다들 이렇게 답답하게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이 삶의 본질 중 하나라는 점에 위로를 얻자는 게 작가의 의도일까? 문제 의식 혹은 문제 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을 찾자고? 삶은 곧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일 것이므로. 


모두 8편. 어느 한 작품도 소홀하게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묵직해지는 아픔 같은 것이 깔리고 또 깔렸다. 남의 것이라도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더 가까워지는 아픔처럼, 낯선 집 창문 안에 누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 집 가족들이 잘 살아 주었으면 싶은 막연한 기대를 품게 된다. 지나간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우리 모두 안 속상하면 좋을 테니까. 저마다의 가정 사정들이 안 속상하면 훨씬 괜찮은 세상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읽으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소설을 받아들이는 내 능력이 조금씩 쌓이는 듯하다. 고마운 일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다면 딸하고도 더 멀어지고 싶었다. - P14

기태가 결혼을 앞두고 태선생을 뵈러 갔을 때 선생은 부부 사이에 하지 말아야 할 말과 생각들을 알아차리는 게 의무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조언을 해준 적이 있었다. - P59

그는 멀리 던져버리고 싶은 생각들을 떠올렸다. 그런 것이 없지 않았다. 잊으려고 하는 것, 잊고 싶은 일, 돌이켜보고 싶지 않은 순간들. 자신 안에 겹겹이 웅크리고 있지만 한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것들. - P109

우리가 뭘 안다고 해서 누구한테 해가 되지는 않잖아요. - P121

이제 술의 충동이 느껴질 때면 오숙은 주방으로 가서 딱딱한 우엉이나 당근, 콜라비 같은 야채들을 도마에 올려놓고 채를 썰기 시작한다. 식도는 매번 잘 갈아둔다. 무딘 칼로 채를 썰다가는 손을 다치기 십상이고 상처가 나면 아물어도 흉터가 남으니까. 채는 가늘고 고르게, 집중해서 얇게 편을 썰어 재료를 비스듬히 눕혀서 다시 가느다랗게 썬다. 어느 땐 한 시간 만큼의 당근을, 어느 땐 두 시간 만큼의 우엉을. 양푼에 우엉채나 당근채가 수북이 쌓이면 그 충동이 자신을 지나가버린 흔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 P133

자기 길을 찾은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이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사람들, 원하는 걸 찾은 사람들, 이 길이 내 길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 P137

나중에 나이 들어서 저렇게 살면 좋겠어요. 편안하게, 깨끗하게. - P189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너 자신을 잊어야 하는 그런 직업은 갖지 말라고. 스물에 서른 이후를, 서른에 마흔 이후를 준비할 필요는 없지만 정말로 하고 싶은 게 뭔지 너무 늦지 않게 찾았으면 한다고. - P220

방금 들어온 집이 고요로 가득해졌다. 거실 창으로 한순간 삼각기둥 모양이 빛이 떨어져내리듯 들어왔다. 슥 지나가는 듯 보였다. 이렇게 장애물 없이 빛이 넓게 들어오는 자리에 서 있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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