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도 배웅도 없이 창비시선 516
박준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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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시집이다. '-습니다'체가 참 그윽하게 읽히고 읽는 그대로 읽는 내 마음을 쓰다듬어 준다. 이런 시집은 반갑지, 요즘처럼 난폭한 시대에는. 말 한 마디로도 용서를 할 수 있겠는데 시 한 구절이라면, 시 한 편이라면, 나는 흘기던 눈빛마저 거두어 들이겠다. 


시인은 멀리 있고, 멀리서 기다리고 있고, 더 멀리서 오는 이를 부르지도 않고 서 있다. 오는 줄 알고 있으니 담담하겠지만 지켜보는 내 마음은 애탄다. 오다가 안 오면 어쩌려고 이러나. 오다가 도로 멀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나. 사람도 계절도 운명도 바라는 이의 바람대로 오는 게 아니던데. 바라지 않는데 오고 바라지 않는데 가서 속상하게 하던데. 이리 다 알고 있으니 시가 이렇게 처연한 것이구나. 나도 너도 우리 모두는 시 앞에서 잠시 허물어져도 괜찮다고. 


슬퍼하지 말라고 할 일이 아니다. 괴로워하지 말라고 노여워하지 말라고도 할 필요가 없다. 느끼면 느끼는 대로 하면 하는 대로 내보이는 감정의 속살들, 부끄럽고 민망할 때 딱 맞춰 시에게 기대면 될 일이다. 그래서 이 시집 안의 시에 종종 기대어 머물렀다. 내 어린 날의 기억들이 도무지 민망하여 견디기 어려웠기에, 그럼에도 그조차 애틋하였기에. 


나는 지금이 퍽 좋다. 마중을 나갈 시간도 배웅을 해야 할 시간도 딱히 없어 퍽 좋다.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치르지도 않고 이 시집을 읽는 지금의 여유가, 지금의 시절이, 지금의 사람들이 퍽 좋다. 

저마다 바래 이제는
비슷한 색을 나누어 가진 지붕들 - P12

멀리 있는 이가 여전히 멀리 있는 것처럼 그래도 있기는 있는 것처럼 - P16

오늘 길어진 네 그림자가
어제 내가 그리워한 것에 닿아 - P17

우리의 목소리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닮아간다 - P33

그런 언덕이라면
좋겠습니다

구부러진 길
끝에서도 내다보이는
- P40

세상 아까운 것들마다 아낀다는 것이다 - P44

속절없이 맞닥뜨리고 있는 것과 애를 쓰며 다시 마주하고자 하는 것의 사이가 이참에 아주 멀어지기를 영영 아득해져서는 삶의 어느 장면에서도 한데 놓이는 일이 없기를 - P55

서른해쯤 전 봄날의 당신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다면 - P77

서산. 저녁이 밤이 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만으로 하루가 충분해질 때가 있다. 시간은 가기도 잘도 간다. 정해진 방향이 없어 가끔 뒷걸음질을 한다. 만약 그날을 기점으로 다시 살아내야 한다면 지금과 꼭 같이 하지는 못할 것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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