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고 있으면 절로 나를 만나게 된다. 시인은 시어를 풀어 놓고 있을 뿐인데 독자인 내가 그 길을 따라가노라면, 지난날의 내가, 가여워서 숨겨 두었거나 부끄러워서 도망시켜 둔 내가 나타난다. 자꾸 나타난다. 자꾸 나타나서 나를 돌보게 한다. 새삼스럽게 나타난 어제의 나를 오늘 만나서 깊이 돌보게 해 주는 시를 나는 아주 좋아한다.
이 시인의 등단 작품을 알고 있다. 1983년의 '비망록'. 하지만 작가의 시집을 읽었거나 가진 적은 없는 듯하다. 이 책을 보면서 일찍 못 본 아쉬움을 곱씹었다. 이제라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에 고마워할 밖에.
시집 안에서 청춘이 자주 보인다. 청춘인 시절, 청춘에 일어나는 일, 청춘에 버린 일상, 청춘에 시달리는 꿈들. 시인의 이력을 살펴보면 작가에게는 지나간 청춘인 줄 알겠는데 청춘이 한참 지난 줄 아는 내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온다. 지금 청춘인 독자에게도 그럴 것 같다. 생생하다. 두근거리는 청춘의 심장 소리라는 게 느껴져서 당황스럽다. 시를 읽으면서는 좀처럼 들썩이지 않는데 이 또한 자연스럽다. 내가 아직 이러기도 하는구나.
작약과 같이 송이가 큰 꽃보다는 작은 크기의 꽃송이를 좋아하는 편이다. 작약이 꼭 작약이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꽃들의 이름을 불러낸다. 제라늄이라든가 튤립이라든가 페츄니아라든가 달맞이꽃같은 것들. 꽃만 부르고 있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따뜻해지니 위험하지도 않다. 세상이 이렇기만 하다면야.
시는 본질적으로 혼자 읽는 게 유리한 대상이다. 나눌 수도 있겠지만 나눠서 좋을 수도 있겠지만 혼자 머물러 쓸쓸해져 본 적이 있다면 양보하고 싶지 않게 된다. 어떤 회한은 아무하고도 나누고 싶지 않기도 하니까. 빗소리 가득한 바닷가에 이 시집을 취급하는 책방을 찾아 나서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즐겁다.
<woojukaki님이 보내신 여름 선물>
12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15
떠나면 후회할까 봐 후회를 떠나지 못하는
16
차라리 기차를 백만 원어치 탈걸
천천히 양말을 백만 원어치 고를걸
19
나는 비정하지만 조용합니다
무심하지만 평온합니다
나는 잘나지 못했지만 혼자 잘났습니다
27
눈송이는 매일 쏟아져도 눈동자에 좋을 텐데
41
이름이나 글씨는 언제나 마음을 약하게 합니다
60-61
내 기분은 오직
내 사정이지만
라일락 꽃잎들이
바다에 가라앉을 확률
대한민국의 사건 사고에 좌우되기도 하지요
77
벽지에 붙여 놓은 결심이 아닌 후회들
피요르드식 해안으로 점철된 사랑 아니 이별
138
세상엔 좋은 사람이 더 많다니까
그는 흔하고
나는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