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강은 그녀를 끌어내린다
윤지현 지음, 박지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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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목소리가 들려." 수진이 말했다.

"무슨 목소리?"

"생명을 되살릴 때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우리 가문 여자들의 목소리야."

"뭐야, 귀신 같은 거야? 말도 걸 수 있어?" 마크가 물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뭐랄까......" 수진은 적당한 말을 생각했다. "기억의 콜라주 같아. 여자애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 내가 듣는 걸 통제할 수는 없어. 옆방에 서 누가 라디오 채널 돌리는 걸 엿듣는 것 같아."                    p.48~49


열일곱 수진에게 죽음은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7년 전 어머니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고, 작년 가을에 언니 미래가 강에 빠져 죽었기 때문이다. 언니 미래는 고작 한 살 많았는데도 무엇이든 담담히 견디는 대범한 성격이었고, 엄마처럼 수진을 챙겨주는 존재였다. 갈등이 있을 때마다 따뜻한 차를 내밀고 다정한 말을 건네며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언제나 미래였다. 수진은 언니의 죽음 이후 엉뚱한 딸이 살아남은 게 아닐까, 언니가 살아 남았다면 아버지의 삶은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꿔 주던 존재이자 아버지에게 든든한 장녀였던 미래가 사라지고 열 달이 지났지만, 수진은 여전히 슬픔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해안가 작은 마을 ‘제이드 에이커’는 백인이 득세한 곳이었고, 이곳에서 한국인 자매와 가족은 소수자에 속했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수진의 집안에는 여성들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마법이 있었다. 가문의 여성 혈통을 타고 전해지는 가보는 먼 옛날 참혹한 폐허와 굶주림에 허덕이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 굶주리던 저주받은 해의 저주받은 계절, 그들 가족은 닭 뼈를 땅에 묻고 그 흙에서 살아 있는 암탉을 꺼낸다. 가족의 비밀 암탉은 백 번의 죽음을 맞이하며 가족들을 살려냈다. 지금 수진은 반려 생쥐인 밀키스를 그런 식으로 십여 번 되살려냈다. 잘린 꼬리를 땅에 묻고 죽은 생명을 되살려 낼 때면 오래 전 가문의 여자들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소녀에서 소녀에게 전해 내려온 무형의 가보. 기적과도 같은, 생명을 불어넣는 여자들로 가득한 집이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구하지 못했다. 재능에는 대가가 따랐고, 작은 동물만 되살리기로, 그것도 자주 하지 않아야했다. 엄마와 언니가 죽었으니, 이제 수진은 재능을 가진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귀신이 되는 걸 너무 거창하게 생각해. 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엄마는 귀신의 부름 때문에 그리된 게 아니야. 아이를 보내지 못하는 자신의 간절한 마음 때문에 그렇게 됐지. 그 마음 때문에 죽고 만 거야. 마크, 그게 전부란다. 귀신이 되는 건 단 하나, 놓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야. 우리를 괴롭히는 건 우리가 놓아줘야 떠나는 거야.”

... 그건 어떤 기분일까? 어떤 대상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자기 삶을 완전히 버린 채 바다로 헤치고 들어가는 마음이란?             p.284~285


수진은 물에 빠져 죽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았다. 언니의 시신이 발견되고 첫 한 달 동안에 같은 꿈만 꾸었기 때문이다. 잠들 때마다 물에 빠졌고, 숨을 헐떡이며 물 밖으로 올라가려고 몸부림치다 잠에서 깨곤 했다. 그 감각은 이름 없는 유령이 되어 자지 않을 때도 예고 없이 수진을 덮치곤 했다. 목구멍이 꽉 막히는 느낌에 주변 시야가 축축하게 젖어들며 어두워졌다. 수진은 너무도 외로웠고, 언니가 그리웠다. 결국 수진은 축축한 구덩이에 언니의 젖니를 넣고 흙을 덮은 다음 무릎을 꿇는다. 밀키스를 되살리던 것과는 달랐다. 수진은 자신이 없었고 성공하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끝내 금기를 어기고 죽은 언니를 되살려낸다.  언니는 원래 모습 그대로 다시 돌아왔다. 특유의 습관도 달라지지 않았고, 기억력도 완벽했으며, 눈에 띄는 부분은 거의 모든 게 그대로였다. 하지만 미래는 수진이 알던 그 언니가 맞는 것일까. 금기를 어긴 수진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까. 


이 작품은 한국계 미국 작가 윤지현의 첫 장편소설이다. ‘장화 홍련’ 설화를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스릴러로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해서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가 창가 화분에 심은 대파 뿌리가 다시 살겠다는 의지로 빛을 향해 힘겹게 솟아오르듯, 땅에 묻힌 뼈도 되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비옥한 흙 사이로 흰 깃털이 어렴풋이 보이기를 기다리며 마당에 닭 뼈를 묻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이 이 작품의 토대가 되었다. 슬픔에 잠긴 소녀가 죽은 언니의 치아를 땅에 묻어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죽음과 협상해 이겼다고 가정해 본다면 말이다. 죽은 이를 되살렸다고 해서 죽기 전과 같아질 수 있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되살아난 사람에게, 공동체에게 정말 더 나은 일인 걸까, 생각해 본 것이다. 작가의 결론은 '슬픔을 묻어두기보다는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장화 홍련’처럼 불온한 운명에 빠진 여성들의 설화를 음울하고도 아름답게, 우아하고도 기이하게 그려내고 있다. 강렬한 표지 이미지만큼이나 압도적인 몰입감을 주는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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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책방 도감 ㅣ 이야기가 있는 디테일 도감
마사키 데쓰야 지음, 백운숙 옮김 / 윌북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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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나무는 설계를 맡은 건축사의 제안으로 설치한 거대 서가다. 자유로운 곡선으로 잘라낸 합판으로 만든 선반을 일정한 간격으로 쌓아 올렸는데, 마치 움푹 주름 잡힌 커다란 느티나무를 보는 듯하다. 텅 빈 책나무 내부는 아이들을 위한 비밀 독서 공간이다. 매장에 발을 들인 손님들은 하나같이 매장 입구에 우뚝 솟은 책나무를 올려다본다. 그러고는 책나무에 꽂힌 그림책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한다. 책나무를 둘러싼 계단을 하나둘 오르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 그림책과 어린이책의 세계에 빠져든다.              p.23


도서관, 혹은 책방의 도서관 문을 여는 순간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마법과도 같다. 서가에 가득찬 책들의 냄새와 조용한 분위기가 방금 전까지 소란스럽던 세상의 소음을 다 없애준 듯한 느낌도 든다. 그래서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서점이란, 낯선 곳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해외 여행을 가면 현지의 책방을 꼭 들르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처음 가는 도시에 있는, 읽을 수도 없는 언어로 된 책들로 가득한 서점에서도 특유의 분위기와 공기로 인해 익숙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일본의 개인 서점, 사설도서관, 북카페 등 '책이 있는 공간'을 찾아가 공간을 실측해서 그린 입체 도면을 한데 엮은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공간 마흔네 곳은 거의 일본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이 책을 들고 일본 책방 투어 여행을 떠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도호쿠, 간토, 고신에쓰 지역, 호쿠리쿠, 도카이, 긴키 지역, 주고쿠, 시코쿠 지역, 규슈, 오키나와 지역으로 구분해 책이 있는 공간들을 정리해두었다. 지역도서관과 대형 서점 체인점이 임팩트 있는 큰 공간을 연출하는데 비애, 개인 서점, 사설도서관, 북카페 등은 작지만 늠름하게 자기만의 공간을 가꿔나가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서점 내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실측 기반 공간 분석 일러스트를 구경하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다. 서점 해부도는 각각의 요소들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어 굉장히 디테일하며, 일러스트 자체가 너무 아름다워 페이지를 넘겨가며 서점 도면들을 보아도 참 좋았다. 




금방이라도 책에 파묻힐 것 같은 서가 공간을 지나면 카페 공간이 나온다. 카페 공간의 두 벽면에 난 커다란 전면 창이 시원한 개방감을 안겨준다. 서가가 책변색을 피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안쪽 벽면에 모인 덕이다. 카페 공간은 주방 급배수를 위해 높게 올린 카운터 바닥보다 한 단 낮아서 탁 트인 공간인데 아늑하기까지 하다. 예전 매장에서는 아예 분리돼 있던 카페 공간과 서가 공간이 어우러진 레이아웃은 혼자서 두 공간을 오가야 하는 주인에게는 효율적인 동선이다.              p.171


옛 정취 물씬 나는 술집 골목에 자리한 서점의 서가에는 헌책과 신간이 의도적으로 섞여 있고, 고등학생이 연 무인서점은 1년마다 책장 주인이 바뀌는 운영 방식이 인상적이다. 디자이너 겸 책방지기기 완성한 서점은 다양한 색감을 활용한 인테리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목재 창고를 리노베이션한 서점은 높은 천장과 비스듬한 기둥을 살린 역동적인 인테리어가 매력적이다. 서가를 한 바퀴 돌면 세계 여행을 한 듯한 기분이 드는 서점도 있고, 폐관한 영화관에 딸린 작은 티켓 창구를 리모델링해 문을 연 서점은 남의 서재를 몰래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이  드는 공간배치가 매력적이다. 초록색 공중전화 부스를 활용해서 만든 사방 80cm의 초소형 도서관도 있고, 심야 열한 시에서 새벽 세 시까지 4시간만 영업하는 헌책방도 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매력의 책방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저자는 직접 이 공간들을 찾아가 줄자로 공간의 치수를 재고 집기의 배치까지 1mm 단위로 실측해 기록했다. 이렇게 탄생한 애정 어린 도면과 일러스트들은 일본 현지에서도 건축 관계자는 물론 서점 덕후들에게 큰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책과 서점을 사랑한다면, 언젠가 나만의 서점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편한 인터넷 서점에서 클릭 한 번이면 바로 책이 내 집 현관 앞으로 오는 시대에 굳이 수고롭게 동네 책방을 찾아 가는 이유가 뭘까. 책방이 단순히 책이라는 물건을 사고 파는 장소가 아니라 '타인과 공존하는 곳이자 지친 마음들이 위로 받고 연결되는 곳'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프랜차이즈 서점이 등장했다 금세 사라지고, 온라인 쇼핑이 엄청나게 성장하고, 전자책 독자들이 탄생하면서 책과 서점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 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도 있지만, 이런 책을 보고 있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방이 없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책이 있는 공간을 사랑한다면 이 아름다운 책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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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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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스의 산문집 <물질적 삶>에서 그의 주방 벽에 붙어 있던 물건의 목록을 본 적이 있다. 가는소금부터 락스, 철수세미, 절연 테이프까지 꼼꼼히 적혀 있던 생필품들. 두 번의 전쟁을 겪었던 그의 어머니가 늘 벽장 속에 채워뒀던 물품들과 꼭 닮은 목록이다. 우리는 어머니가 만든 집을 떠나 어머니를 닮은 집을 만들며 살아간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돌아갈 집 그 자체가 되어줬던 것처럼,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집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여자들이다. 뒤라스의 세계에서 집으로 유토피아를 창조하고, 스스로 집이 되고, 그곳에 결국 '혼자' 남게 되는 것은 언제나 여자들이다.                p.16~17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한국에서 가장 많이 번역한 프랑스 문학 번역가이자 소설과 산문을 발표하기도 한 작가 신유진의 신작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알베르 카뮈, 프랑수아즈 사강, 장 그르니에, 아니 에르노, 밀란 쿤데라, 조르주 페렉, 엘렌 식수 등 프랑스 작가들의 문장과 삶을 따라가며 근사한 사유가 펼쳐진다. 글을 쓸 때마다 갇힌 것과 깨부수는 장면을 동시에 상상한다는 저자는 접힌 모서리를 펼치고, 매끄러운 막 아래 숨은 자신을 꺼내면 어떤 내가 나올까 생각하며 이 책을 썼다. 작가의 책을 펼치고, 그와 함께 그의 근원지로 내려가면서 그곳에서 나의 진짜 기억과 마주하고, 나의 수치심을 넘어 타인의 수치심을 만났던 기억이 이 책을 쓰게 했다. 그래서 이 책은 날카롭게 갈린 언어로 표면의 막을 내리찍어 부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도록.


작가와 작품은 완전히 별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삶을 통해 그 작품을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작품이 허구의 창작물이라 해도, 분명 작가의 삶에서부터 묻어 나오는 부분이 있을 테니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작가의 흔적을 따라 그가 태어난 곳부터 살았던 장소들을 찾아가보기도 하면서 실제 그 곳을 느끼고 경험하려고 하는 것일테고 말이다.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실제 장소가 아니라, 작가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글쓰기의 근원이자 기억의 장소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도 흥미로웠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의 조건들이 다르게 마련이고, 그것이 어떻게 작용해 문학 작품을 이루게 되었는지를 고스란히 따라가 보는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한 사람이 끝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무엇을 부수고 다시 세울 수 있는지 함께 탐색해보는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어떤 장소나 대상을 관찰할 때, 그것이 가진 모든 세부 사항을 남김없이 기록하여 더 이상 쓸 것이 없을 때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을 취했다. 단순히 물건을 적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표면 아래에 숨겨진 실체를 바라보려고 한 것이다. 동사가 사라진 자리에 빽빽하게 들어찬 명사들의 숲을 헤치며, 페렉은 묻는다. 사물의 목록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존재는 그만큼 더 선명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그 속에 파묻혀 지워지고 있는지. 이 욕망의 숲에서 벗어나기 위해 페렉이 제안하는 방법은 그것들을 다시 제대로 응시함으로써 감각을 되찾는 것이다.             p.162~163


뒤라스 사후에 그의 아들이 어머니의 레시피를 모아서 출간한 책 <마르그리트의 요리>에 대한 글 뒤에는 뒤라스의 파 수프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고,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에서 태양이 한 역할에 대한 글 끝에는 태양의 성지를 찾아 떠나는 카뮈의 지중해 가이드가 담겨 있다. 아니 에르노와 에두아르 루이의 삶을 오디세우스들의 서사로 풀어낸 글 뒤에는 오디세우스의 항해 일지가, 다니엘 페나크의 몸에 대한 사유를 그려낸 글 뒤에는 다니엘 페나크의 몸 번역 노트와 번역가를 위한 몇 가지 조언이 담겨 있다. 한 작가의 삶과 문학을 이루는 저변에 사소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단서들을 찾아내 글로 풀어내고 있어 너무 흥미롭게 읽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게는 파 수프가, 아니 에르노에게는 오디세우스의 서사가, 알베르 카뮈에게는 이방인이, 조르주 페렉에게는 장소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는 적어가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어떤 작품을 읽을 때 '책 속에 있는 그들과 책 너머에 있는 이들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근원지를 찾아 사다리를 타고 깊숙이 내려간다. 뒤라스의 눈으로 여자와 바다를 보자면 현실의 부정이 아니라 반복의 중독이 있고, 카뮈의 부조리는 눈을 멀게 하는 빛과 숨을 조이는 더위, 지친 육체라는 몸의 감각에서 태어났다. 사강의 사진은 대체로 드레스를 입은 파티걸의 모습이지만, 진짜 좋아했던 것은 미니 블랙 드레스가 아니라 포근한 스웨터라는 사실에서 스웨터는 나 자신과 타자를 감쌀 만큼 온기를 가진 문학적인 옷이 된다. 한 번도 모방과 흉내 내기를 하지 않으며 적어에 복종한 적이 없었던 ㅏ고타 크리스토프의 고집스러운 싸움을 알게 되면 그의 작품 속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그렇게 문학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다시 나에게로 당도하는 여정이기도 했다. 작가와 문학을 읽어내는 가장 독창적인 방식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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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람 엄금 ㅣ 엄금 시리즈
치넨 미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북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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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월에 다마시에서 발생한 대량 살인사건에 관한 기록을 세 개 제시했다. 이 자료들을 보고 여러분은 알아차렸을까? 이 사건에는 명백하게 '이상한 점'이 존재한다. 그 '이상한 점'이 바로 이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무서운 비밀을 밝힐 실마리다. 그렇다, 단순한 무차별 살인으로 보이는 이 사건의 이면에는 머리털이 쭈뼛 설 만큼 무서운 진실이 숨어 있다. 알고 나면 당신이 지금까지 봐 왔던 세상이 싹 달라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진실'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기록은 그러한 위험성을 고려하고 주의 깊게 읽길 바란다.             p.14~15


도쿄에서 끔찍한 대량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대낮에 한 남자가 도끼를 들고 축제 참가자들을 덮쳐 11명이 사망하고, 6명은 의식불명의 중태 상태다. 남자는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는데, 뜻 모를 말만 되풀이해 책임 능력 유무를 포함해 신중하게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무차별 살인사건의 범인인 야에가시 신야의 정신 감정을 맡은 정신과 의사 우에하라 가스미는 명백히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범인은 몇 달 전부터 강한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무단결근을 했고, 계속 감시당하고 있다,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 어디에 숨어도 누군가 날 보고 있다는 발언을 하며 전형적인 조현병과는 약간 다른 증상을 보인다. 조현병 환자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피해망상과 혼란 증상이 보였지만, 다른 정신 질환의 특징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오랜 시간 폐쇄된 공간에 갇힌 사람에게 발생하는 정신 질환인 '간저 증후군'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아 의식이 몽롱해지거나 환각 또는 망상에 사로잡혀, 대화는 가능하지만 마치 장난치는 것처럼 엉뚱한 대답을 반복하게 되는데, 야에가시의 증상이 바로 그러했다. 어딘가에 감금당한 적이 없는데 왜 이런 증후군이 발생한 걸까. 게다가 간저 증후군 환자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기는 해도, 사고가 분열된 조현병 환자와 달리 질문의 의미 자체는 올바르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가 횡설수설 늘어놓았던 말들의 의미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그는 대체 왜 아무도 없는 쓰레기장에 가서 도끼를 휘두른 것일까. 그는 왜 대량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일까. 누가봐도 아무도 없는 공간에 덤벼들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야에가시는 '거기에는 '그것'이 있었어.... 너희가... 모를... 뿐이지...'라고 말한다. 우에하라 가스미는는 이 사건 이면에 숨겨진 뭔가가 있음을 직감하고는 실체를 직접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과연 우리는 그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 그러니까, 지금 난 이 책의 독자, 바로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거야.

─ 이 책을 읽고 반응을 보는 건 일종의 '임상시험' 같은 거지. 그래서 임상시험의 규정에 따라 처음에 양해를 구했어. 이 책을 읽으면 위험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읽기를 그만둘 수 있다고 말이야.

─ 이 책을 끝까지 읽었으니 당신은 임상시험에 동의한 셈이겠지. 그러니 당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나에게 보여줘. 

─ 당신에게는 책임이 있어.               p.277~279


실제 핸드폰 사이즈의 책으로 신개념 모큐멘터리 호러라는 독특한 장르의 이야기를 보여주었던 <스와이프 엄금>, 그 후속작이다. <열람 엄금>에서는 전작인 <스와이프 엄금>에서 촉발된 '도메키'라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진상이 밝혀진다. <스와이프 엄금>은 핸드폰만 한 크기의 책이라는 점도 흥미로웠지만, 실제로 진행되는 서사가 평소 핸드폰으로 이용하는 온갖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책을 읽는 동안 실제로 핸드폰 화면을 스와이프하는 듯한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괴물 도메키가 진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시종일관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다. 전작처럼 이번 작품 역시 독특한 구성과 전개 방식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다’는 기묘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열람 엄금>은 오직 정신 감정 전문의 우에하라 가스미의 인터뷰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인터뷰 내용 사이 사이에 신문 기사, 현장 사진, 이메일, 지도, 단면도, 핸드폰 화면, 각종 보고서와 같은 여러 증거 자료들이 삽입되어 생생하게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시작부터 경고 페이지가 있는데, '이 기록은 여러분에게 예기치 못한 정신적 영향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며, '절대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읽더라도 원하면 언제든 중간에 그만둘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경고를 보고도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을 다 거치고 나면, 마지막 페이지에 남겨진 문장 또한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어 준다. 갑자기 책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 책이 말을 걸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게 모큐멘터리의 극한을 보여주는 거라면, 우리는 공포와 놀라움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다. 허구의 현실의 경계를 흐리며 공포와 놀라움을 동시에 안겨주는 '독서 체험'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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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그 너머로 - 지구와 태양계, 그리고 블랙홀까지 우주를 가로지르는 아찔하고 흥미로운 지적 모험
닐 디그래스 타이슨.린지 닉스 워커 지음, 김소정 옮김 / 현암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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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계를 탐사하는 이야기에는 수많은 시작이 있으나 끝은 없다. 그 이야기에서 오래된 생각과 가정은 폐기되었고 한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대체되었다. 지구가 우주의 움직이지 아 ㄶ는 완벽한 중심이라는 지위를 박탈당한 순간부터 발전한 새로운 기술과 수학 덕분에 우주에서 인간이 갖는 정체성은 그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극적인 흥분과 믿기 어려움, 그리고 겸손이 가득한 이야기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p.101


<코스믹 쿼리>에서 경이로운 우주의 위대한 미스터리들을 유쾌하게 들려줬던 닐 디그래스 타이슨의 신작이다. 이번에는 지구의 중력을 거스르고 날아올라 무한 그 너머에 있는 미지의 풍경을 향해 나아간다. 전작에서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이곳에 존재하게 되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천체물리학의 혁신적 개념으로 풀어냈다면, 이 책에서는 유한한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우주를 향한 그 집요하고도 경이로운 발견의 순간들을 담고 있다. 


1400만 명의 SNS 팔로워를 지닌 세계적인 과학 커뮤니케이터이자 칼 세이건의 후계자답계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우주에 대한 개념들을 즐겁고,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인류가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새처럼 날아오르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이야기라는 형태를 빌려 처음으로 날아오르고,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솟구치는 로켓을 만들고, 인공위성, 태양계 행성 탐사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진다. 지구의 대기권에서 시작해 태양의 뒷마당, 우주 외곽, 그리고 무한 그 너머로 향하는 모험은 아직 우리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우주에 대한 인류의 러브레터와도 같다. 또한 상대성이론이 허락하는 기이한 왜곡 현상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보여주었던 영화 <인터스텔라> 속 블랙홀의 원리, 실제 현실과는 다른 영화 <마션> 속 엄청난 모래 폭풍의 비밀 등 흥미진진한 사례와 스토리텔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세계 해석 가설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로 돌아간 여행자는 평행우주여행자이기도 하다. 한 우주에서 이미 정해진 시간선을 변경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은 다른 우주에서 대신 발생하기 때문에 이전 시간선을 보존할 수 있다. 이전 시간을 보전할 수 없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던 이전의 '당신'은 그 시간선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미래의 '당신'이 뒤에 남긴 과거의 '당신은 어떻게 됐을까?                   p.362


20세기 중반까지 우주는 인류에게 단지 신화의 영역이거나 천문학적 탐구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주는 단순한 탐험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도달 가능한 공간, 인간이 거주 가능한 공간까지 확장되어 가고 있다. 우주개발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고, 지구를 넘어 달과 화성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주는 국가 경쟁의 무대이자 자원의 최전선이며, 동시에 인간의 상상력이 확장되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이 처음 달에 도착하고, 화성 탐사에 민간 기업들이 참여하는 모습을 보며 언젠가는 정말 공상 과학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달 여행이 일상적인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멀지 않은 미래에 가능한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린 시절에 나를 가장 매혹시켰던 것은 블랙홀을 비롯해서 우주와 관련된 분야였다. 무한대의 우주란 끊임없는 이야기 거리가 쏟아져 나오는 곳이었고, 천문학과 관련된 이야기는 신기할 만큼 읽어도 읽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 한참 우주에 빠져 살았던 그 시기가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특히나 이 은 중간 중간 우주 수수께끼, 과학의 역사, 영화 속 과학, 탐사 코너가 별도로 수록되어 있어 여러가지 관점에서 다양하게 천체물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개인적으로는 야구공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이유, 지구 중심부를 통과해 떨어지기,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벌컨을 죽였나, 왕의 이름을 가질 뻔한 행성 등 우주 수수께끼에 담긴 내용들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우주를 더욱 실감 나게 전하는 NASA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공식 사진 자료들도 풍성하게 수록되어 있어 우주 구석구석을 유영하는 데 도움이 되어준다. 자, 무한한 우주로 떠나는 여정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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