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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뒤라스의 산문집 <물질적 삶>에서 그의 주방 벽에 붙어 있던 물건의 목록을 본 적이 있다. 가는소금부터 락스, 철수세미, 절연 테이프까지 꼼꼼히 적혀 있던 생필품들. 두 번의 전쟁을 겪었던 그의 어머니가 늘 벽장 속에 채워뒀던 물품들과 꼭 닮은 목록이다. 우리는 어머니가 만든 집을 떠나 어머니를 닮은 집을 만들며 살아간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돌아갈 집 그 자체가 되어줬던 것처럼,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집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여자들이다. 뒤라스의 세계에서 집으로 유토피아를 창조하고, 스스로 집이 되고, 그곳에 결국 '혼자' 남게 되는 것은 언제나 여자들이다. p.16~17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한국에서 가장 많이 번역한 프랑스 문학 번역가이자 소설과 산문을 발표하기도 한 작가 신유진의 신작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알베르 카뮈, 프랑수아즈 사강, 장 그르니에, 아니 에르노, 밀란 쿤데라, 조르주 페렉, 엘렌 식수 등 프랑스 작가들의 문장과 삶을 따라가며 근사한 사유가 펼쳐진다. 글을 쓸 때마다 갇힌 것과 깨부수는 장면을 동시에 상상한다는 저자는 접힌 모서리를 펼치고, 매끄러운 막 아래 숨은 자신을 꺼내면 어떤 내가 나올까 생각하며 이 책을 썼다. 작가의 책을 펼치고, 그와 함께 그의 근원지로 내려가면서 그곳에서 나의 진짜 기억과 마주하고, 나의 수치심을 넘어 타인의 수치심을 만났던 기억이 이 책을 쓰게 했다. 그래서 이 책은 날카롭게 갈린 언어로 표면의 막을 내리찍어 부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도록.
작가와 작품은 완전히 별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삶을 통해 그 작품을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작품이 허구의 창작물이라 해도, 분명 작가의 삶에서부터 묻어 나오는 부분이 있을 테니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작가의 흔적을 따라 그가 태어난 곳부터 살았던 장소들을 찾아가보기도 하면서 실제 그 곳을 느끼고 경험하려고 하는 것일테고 말이다.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실제 장소가 아니라, 작가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글쓰기의 근원이자 기억의 장소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도 흥미로웠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의 조건들이 다르게 마련이고, 그것이 어떻게 작용해 문학 작품을 이루게 되었는지를 고스란히 따라가 보는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한 사람이 끝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무엇을 부수고 다시 세울 수 있는지 함께 탐색해보는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어떤 장소나 대상을 관찰할 때, 그것이 가진 모든 세부 사항을 남김없이 기록하여 더 이상 쓸 것이 없을 때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을 취했다. 단순히 물건을 적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표면 아래에 숨겨진 실체를 바라보려고 한 것이다. 동사가 사라진 자리에 빽빽하게 들어찬 명사들의 숲을 헤치며, 페렉은 묻는다. 사물의 목록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존재는 그만큼 더 선명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그 속에 파묻혀 지워지고 있는지. 이 욕망의 숲에서 벗어나기 위해 페렉이 제안하는 방법은 그것들을 다시 제대로 응시함으로써 감각을 되찾는 것이다. p.162~163
뒤라스 사후에 그의 아들이 어머니의 레시피를 모아서 출간한 책 <마르그리트의 요리>에 대한 글 뒤에는 뒤라스의 파 수프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고,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에서 태양이 한 역할에 대한 글 끝에는 태양의 성지를 찾아 떠나는 카뮈의 지중해 가이드가 담겨 있다. 아니 에르노와 에두아르 루이의 삶을 오디세우스들의 서사로 풀어낸 글 뒤에는 오디세우스의 항해 일지가, 다니엘 페나크의 몸에 대한 사유를 그려낸 글 뒤에는 다니엘 페나크의 몸 번역 노트와 번역가를 위한 몇 가지 조언이 담겨 있다. 한 작가의 삶과 문학을 이루는 저변에 사소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단서들을 찾아내 글로 풀어내고 있어 너무 흥미롭게 읽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게는 파 수프가, 아니 에르노에게는 오디세우스의 서사가, 알베르 카뮈에게는 이방인이, 조르주 페렉에게는 장소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는 적어가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어떤 작품을 읽을 때 '책 속에 있는 그들과 책 너머에 있는 이들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근원지를 찾아 사다리를 타고 깊숙이 내려간다. 뒤라스의 눈으로 여자와 바다를 보자면 현실의 부정이 아니라 반복의 중독이 있고, 카뮈의 부조리는 눈을 멀게 하는 빛과 숨을 조이는 더위, 지친 육체라는 몸의 감각에서 태어났다. 사강의 사진은 대체로 드레스를 입은 파티걸의 모습이지만, 진짜 좋아했던 것은 미니 블랙 드레스가 아니라 포근한 스웨터라는 사실에서 스웨터는 나 자신과 타자를 감쌀 만큼 온기를 가진 문학적인 옷이 된다. 한 번도 모방과 흉내 내기를 하지 않으며 적어에 복종한 적이 없었던 ㅏ고타 크리스토프의 고집스러운 싸움을 알게 되면 그의 작품 속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그렇게 문학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다시 나에게로 당도하는 여정이기도 했다. 작가와 문학을 읽어내는 가장 독창적인 방식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