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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스텝 ㅣ 위픽
박재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니."
구원이라니. 그 거대하고 추상적인 단어를 듣고 해원은 말문이 막혔다. 해원은 항변하고 싶었다. 회장과 맨발 산행 회원들이 순자를 구원하고 있다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고. 피도 안 섞인 사람들과 어떻게 하나가 되냐고. 하지만 순자의 평온하고 해말간 얼굴을 지켜본 지난 며칠을 상기했을 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순자는 정말 구원받은 것처럼 보였다. 단절과 외로움으로부터. p.66
해원은 5년의 연습생 기간을 거쳤지만 데뷔하지 못한, 소위 한물간 가수 지망생이다. 최근에는 모창 능력자를 가리는 서바이벌 예능 <히든 싱어>에 섭외되어 연습 중이었다. 히든 싱어의 주인공은 한때 아이돌 그룹의 메인 보컬이었지만 지금은 솔로로 활약 중인 가수 이현이었다. 매력적인 외모와 뛰어난 보컬로 해원의 나이에 전성기를 이루고 평생 쓸 돈을 다 벌어서 이제는 돈 욕심이 없다고 인터뷰하던 삼십대 여자 가수 이현. 해원은 오래전부터 이현과 이어져 있다고 믿었다. 연습생 시절부터 이현의 노래를, 마치 이현처럼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원은 히든 싱어에서 자신과 똑같은 목소시를 내는, 운명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현이 발견하기를 상상하며 설렌다.
예능 다시 보기를 눌르려던 참에 엄마로부터 연락이 온다. 벨소리를 무음으로 해놓고 영상을 한참 보다 다시 보니 부재중 전화가 네 통 찍혀 있었다. 전부 엄마가 보낸 것이었다. 카톡을 확인하니 집으로 와라. 비상이다.라는 메세지가 있었고, 해원은 7년 만에 본가로 내려간다. 여러 가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도착해 보니, 엄마는 웬 중년 여자와 함께 였다. 엄마는 산에 오르다가 삐끗했다며 발목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함께 있던 여자는 맨발 산행을 하는 모임의 회장이라고 했다. 근대화의 문제적 현상, 세계와 단절된 현대인들, 땅과 접촉해야 전일성 회복을 명복으로 맨발 산행을 한다는데, 해원에게 방송 출연 전 산에 올라 좋은 기운을 받아 보라고 권유한다. 엄마는 맨발 산행을 통해 불면증이랑 우울증이 완치되었다며 회장을 대단하신 분이라며 맹목적으로 치켜세운다.

교회의 교인들도 입을 모아 신이 있다고 증언했었는데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해원은 순자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믿고 싶은 것을 믿기 위해 그럴듯한 이유를 자꾸 만들어내고 갖다 붙이는 것이다. 해원과 둘이 살 때도 순자는 그랬다. 세상에 자기편은 없으며 모두 저 좋을 대로 사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는 믿음에 갇혀 순자는 해원도 그 범주에 넣었다. p.86~87
해원은 맨발 걷기 모임이 단순한 건강 동호회인지 사이비 다단계인지 알 수가 없다. 가족인 자신도 하지 못한 엄마의 구원을 다른 사람이 했다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사이비에 빠진 가족 구하는 법을 검색해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맹목적인 엄마 순자가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족이 사이비에게 빠졌을 경우 손절하거나, 직접 그것을 경험해 보고 허술한 믿음을 공량하는 방법이 있다는 글을 보고 해원은 회장이 권유한 맨발 산행에 참여하기로 한다. 직접 맨발로 산을 걸어보니 땅의 촉감이 생생했다. 선득한 느낌이 발끝에서 올라와 온몸으로 파고들었고, 해원은 엄마와 회장이 반복해 말하던 전일성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하나가 되었다는 감각. 내가 나인채로, 느슨하게. 이 모임은 정말 사이비일까? 사이비는 의도를 가지고 진짜인 척하는 가짜라고 하는데, 그 논리대로라면 이현의 눈에 운명처럼 들고자 그녀를 모창하기로 한 해원도 사이비는 아니었을까.
‘단 한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어 판형이 작고 가볍지만, 양장본이라 튼튼하고 색감이 예뻐 소장용으로 너무 멋진 '위픽 시리즈' 신작이다. 구병모 작가의 <파쇄>를 시작으로 그 동안 무려 101편이나 되는 작품들이 위픽 시리즈로 나왔다. 나도 꽤 많이 읽어 왔는데, 디자인도 예쁜데다 골라 읽는 재미가 있어 너무 좋아하는 시리즈이다. 작품의 키워드가 되는 문장을 이미지로 사용해 심플하지만 멋스러운 표지도, 작품과 찰떡같이 어울리는 알록달록한 색감도 너무 좋다. 박재연 작가는 올해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신인 작가라 이번에 <히든 스텝>으로 처음 만나보게 되었다. 히든 싱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누군가의 정체성과 연결시켜 풀어나가는 방식이 매우 흥미로웠다. 실제로 가장 진짜 같아 보이지 않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실제 그 가수였을때, 어떻게 나를 몰라보냐고 주변 사람들을 탓하게 되는데...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믿는 것에 대해,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토대 위에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애초에 누군가를 온전히 안다고 믿는 것부터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 위픽과 함께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