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물건의 역사 - 돌칼에서 AI까지, 물건들이 만들어온 330만 년 인류의 대장정
칩 콜웰 지음, 김병화 옮김 / 부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축음기 이야기는 물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물건은 어떻게 발명되는가? 이 질문은 우리 현대 물질세계의 핵심에 놓여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으면 더 많은 물건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시 종이 우리 옛 조상들을 행동 전문가 단계에서 창조적 행동 혁신가 단계로 데려간 뒤 호미닌은 세상의 위대한 발명가가 되었다. 그러나 석기가 세상에 탄생한 이후 이런 발명의 순간들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새로운 기술은 어떻게 개발될까?               p.107


우리는 각종 물건으로 넘쳐나는 세상을 살고 있다.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물건은 계속 늘어나고, 너무 많은 물건은 결국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인간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상태에서 모든 것이 필요하게 된 상태로 변화한 계기는 무엇일까. 이 책은 339만 년 전 처음으로 석기를 사용한 동아프리카에서부터 수백만 가지 기술 쓰레기가 산을 이룬 21세기 미국의 매립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물건이 출현하고 발전해온 인류 역사를 살펴본다. 우리가 만들어낸 물건이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수단이 된 것인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소유한 채 자신들이 가진 물건 속에 익사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고고학의 렌즈를 통해 바라본다.


이 책의 저자는 덴버자연과학박물관의 수석 큐레이터로 일해왔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컬렉션을 아끼고 보호하는 큐레이터라는 직업적 특성과는 달리 그가 물건을 손에 넣기보다는 없애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쓰는 미니멀리스트라는 점이다. 오랫동안 '더 많은 물건을 원하지 않는 박물관 큐레이터'라는 정체성의 모순사이에서 고민하던 끝에 이 책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어떻게 인류가 지금 시점에, 물건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물건 때문에 끔찍한 고통을 겪는 세상에 이르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수백만 년에 걸친 여정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인간이 만들고 남긴 물건을 연구하는 것이 직업인 고고학자'로서, 우리는 왜 이렇게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시작한다. 45억 년 지구 역사에서 다른 어떤 생물도 물건과 이처럼 독특한 관계를 형성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쩌다가 동시에 호모 스투펜시스, 자신의 물건들로 규정되고 형성되는, 물건으로 가득 찬 종이 되었을까?




"어째서 물건의 삶이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될까. 소유물을 이해하고, 구분하고, 관리하려는 시도가 통제 범위를 넘어선 소유물의 증식에 압도당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어딘가 뒤틀린 동물적 본능일까? 그들은 특이한 심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면 시민에게 점점 더 많이 소비하라고 요구하는 새로운 소비 사회의 희생자였을까? 21세기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 종이 결핍에서 초과잉으로 나아간 여정을 생각해보면, "비축"이 인간 경험의 중심 특징이 되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p.296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죽은 영혼>에는 자기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수집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낡은 구두창, 넝마가 된 여자 옷, 토기 파편 등 모든 것을 가져다가 방 한구석에 쌓아둔 잡동사니 더미에 모아둔다.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에는 강박적으로 물건을 모으는 중고 물품 가게 주인이 나온다. 온갖 종류의 병, 녹슨 열쇠, 폐기된 법률 서류 등을 모은다. 문맹이라 서류를 읽지 못하면서도 말이다. 아서 코넌 도일의 <머스그레이브 전례문>에서 셜록 홈스는 자기 방의 구석구석에 쌓여 있는 서류를 없애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일종의 '화학 물질과 범죄 흔적'의 비축자로 그리고 있다. 이런 인물들은 허구적 캐릭터이지만, 산업 사회에서 소비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가정 속으로 스며드는 데 대한 커져가는 불안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사회에서 물건은 우리의 정체성을 실어 나르는 수단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사용하는 물건은 개인 수준에서든 집단 수준에서든 정체성의 '시그널'이 된다. 값비싼 명품과 수입자동차와 할머니가 물려주신 낡은 골동품 지갑이 남들에게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수백만 년 전 헐벗은 채 아무것도 없이 살았던 때와 비교하면 물건으로 가득 찬 오늘날의 집 자체도 “경이로울 정도로 신기로운 현상”이다. 한 추산에 따르면 미국 평균 가정의 물건 수는 30만 개에 달한다고 하니 말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인간은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렸다.”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만든 물건들이 거꾸로 우리를 만들고 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고고학, 역사, 세계사, 인류학, 빅히스토리를 아우르는 거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흥미롭게 펼쳐지는 책이었다. 330만 년 인류 진화의 대장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도 대단히 신선했다. 우리는 과연 물건 없이 살 수 있을까? 기존의 인간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 물건들이 만들어온 역사라는 시점으로 그에 대한 대답을 찾는 시간을 가져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마이 달링
요한나 판 베인 지음, 심연희 옮김 / 문학수첩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흐네스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연못 같은 그녀의 홍채 속에서 호기심과 두려움과 무시무시한 공포 그리고 고통을 읽어내었다. 하지만 그 공포와 더불어 강하고 정제되지 않은 묘한 갈망이 보였다. 아흐네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잠 못 이루어 검게 변한 그녀의 눈이 말했다. 나 아파. 가혹하게 뒤틀린 입매가 말했다. 나 자랑스러워. 그러면 주먹을 꼭 쥔 채로 내 앞에서 애써 숨겼지만 어쩔 수 없이 떨리던 손가락은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일부가 품었던, 날 잡고 놓아주지 않겠다는 바람이었나?               p.55~56


"혼령들이여, 여러분을 부릅니다. 이곳에 어서 오시지요. 우리와 함께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혼령들을 환영하는 마음을 사람들이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면, 곧 어린 소녀에게 빙의라는 기묘한 광경이 벌어진다. 스물한 살인 로스는 지나치게 말라서 어린 소녀처럼 보였다. 강령회에 맞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어머니가 먹는 것을 제한시켰기 때문이다. 강령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아직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어린 소녀처럼 보여야 했다. 고객들이 바라는 대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혼령들을 불러 영혼이 빙의한 것처럼 연기하는 게 로스의 역할이었다. 어머니는 로스가 순진하고 무방비한 소녀처럼 보이기를 바래 날씨에 비해서 너무 얇은 하얀 여름용 원피스를 입혀 더 작고 말라 보이게 연출하곤 했다. 로스는 어린 시절부터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 다섯 살때부터 루트 같은 혼령을 알아본 것일 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이어져 온 강령회에서 죽은 자들과 대화하는 것은 전부 가짜였지만, 로스의 곁에 있는 혼령 '루트'는 진짜였다. 강령회에서 루트가 로스의 몸속으로 들어가 방문객들을 헷갈리게 하고, 교묘하게 속이고, 유혹했던 것이다. 피를 나누고 몸을 공유하며 둘은 서로에게 유일한 구원이자 사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해 찾아온 과부 아흐네스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된다. 강령회가 끝나고 루트는 남자 혼령을 발견했다고, 아흐네스가 분명히 자신을 봤다고 흥분해서 말을 한다. 사실 아흐네스에게도 루트처럼 '동반자 혼령'이 있었다. 아흐네스는 다시 찾아와 로스의 어머니에게 돈을 지불하고, 로스를 데려가기로 한다. 어차피 로스가 친딸이 아니었던터라, 돈이 더 중요했던 어머니는 딸을 팔면서도 아무렇지 않다. 게다가 로스 역시 이제 더 이상 거짓말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상황이 반가웠다. 그렇게 함께 지내며 로스는 아흐네스에게 강렬하게 매혹되고, 아흐네스 역시 로스에게 점점 깊이 빠져든다. 




당연히 안 보일 수밖에. 토마스가 혼령이 되어 돌아올 확률은 얼마나 되나? 루트와 피터는 수백 년이 걸렸다. 그들은 죽은 순간부터 시신이 적당한 상태로 묻혔다. 게다가 그들을 깨워줄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토마스를 울음소리로 깨워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가끔 나타나는 여우나 새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거짓말하지 마! 저기 있잖아!"

빌레민이 비명을 질렀다.                p.352


이야기는 로스의 시점과 정신과 의사의 시점에서 교차로 진행된다. 어머니와 강령회를 진행하다, 아흐네스와 함께 살게 된 로스의 이야기와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 과정이 보고서와 대화 형식으로 이어진다. 로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고딕 로맨스의 분위기라면, 의사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스토리는 미스터리에 가깝다. 읽다 보면 살인 사건이 벌어졌고, 환자가 살인자인지, 정신병자인지, 혹은 감형받고자 연기를 하는 중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의사는 로스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문제는 독자인 우리가 그녀와 반려 혼령을 빋을 수 있느냐이다. 


외롭고 폐쇄된 세계 안에 드리우는 불길한 그림자, 살아있는 여자들과 죽은 존재들이 서로를 갈망하고 집착하는 음산한 관계 속에서 사랑과 구원이 소유욕과 광기로 변해가는 과정이 매혹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고딕 퀴어 로맨스'라는 독특한 장르와 정신과 의사와 환자의 상담 사례를 미스터리처럼 결합시켜 기괴하면서도 관능적인 작품을 탄생시켰다. '<레베카>를 강하게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라는 문구 덕분에 궁금했던 작품인데, 고딕 호러 장르를 좋아한다면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드라마틱한 서사로 풀어내는 작품은 아니기에 전반적인 분위기와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며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음산한 저택, 강령술과 혼령, 억눌린 욕망와 위험한 관계... 더위를 싹 가시게 만드는 소설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새들의 세계
마이크 언윈 지음, 류토 미야케 그림, 조은영 옮김 / 시공사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보라볏투라코는 에스와티니와 남아프리카 북동부 인근 지역에서 상당히 흥한 편이고 북쪽으로는 멀리 동아프리카의 케냐 남부까지 분포한다. 이들은 수줍음이 많은 새로, 상록림과 숲 지대에 자주 나타나고 강가의 숲을 따라 사바나까지 들어간다. 또한 주위에서 풍성하게 열리는 돌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따서 통째로 삼킨다. 눈에 쉽게 띄지 않지만 "꿔, 꿔, 꿔" 하는 크고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이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배경음이다.              p.20~21 


지구 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새들이 있다. 우리가 아는 새라고는 손에 꼽을 만큼이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종 수만 총 1만 1,000종 정도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류 종이 분포하는 10개 나라 중 6개 나라가 남아메리카 대륙 북부에 있고, 그중 1위는 1,950종의 보금자리인 콜롬비아라고 하니 모든 종이 골고루 분포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새들은 사막과 산악지대에서부터 빙원과 외해까지, 지구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지역에도 있지만 가장 많이 서식하는 지역은 단연 열대림이다. 


새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기에 수백 년에 걸쳐 그 어떤 동물 집단보다도 많이 연구되었다. 진화론과 같은 근본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수단이 되었고, 수많은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어 셀 수 없이 많은 음악과 그림과 문학을 낳았다. 이 책은 그렇게 수많은 새들 중 80종의 이야기를 담았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삽화들이 특히나 시선을 사로잡는 덕분에 눈이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국민 새부터 바다를 떠도는 방랑자, 무시무시한 맹금류, 열대의 아름다운 새, 그리고 관심 대상종에서 절멸 위급종까지 희귀한 새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름의 유래부터 생김새, 사는 곳, 둥지를 짓는 방식, 먹이를 사냥하는 전략 등 각각의 새가 살아남기 위해 진화시켜 온 고유한 특성들을 디테일하고 생생하게 그려진 일러스트들과 함께 만나볼 수 있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새를 보고 싶은 탐조가라면 코스타리카의 몬테베르데 운무림 보호 지역이 가장 잘 알려진 장소다. 활동 지역 전체에서 서식지 소실은 위협적이다. 케찰이 번식하려면 둥지에 적합한 그루터기가 있고 교란되지 않은 숲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주 출몰한다고 하는 지역에서도 이 새를 보기란 힘들다. 조용히 앉아 있을 때는 초록색 깃털이 축축한 숲 지붕에서 반짝이는 나뭇잎과 완벽하게 섞이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p.131


화려한 표지만큼이나 페이지를 펼치면 다양한 색감들을 만날 수 있다. 오랫동안 왕족의 지위를 상징하며 받을어진 보라볏투라코의 강렬한 붉은 날개깃, 호수를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꼬마홍학들, 친근한 행동으로 여러 세대 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꼬까울새의 주황빛 가슴, 다정한 지저귐으로 여름의 아이콘이 된 제비의 푸른 빛깔, 긴 에메랄드색 바깥 꼬리 덮개가 인상적인 케찰의 초록빛이 페이지마다 색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다. 넘겨가며 일러스트만 구경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만드는 아름다운 조류 도감이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크 언윈은 새와 야생 동물을 찾아 지구 곳곳을 여행하며 자연사 책을 펴내는 작가이다. 이 책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여행은 물론이고 외출마저 어려웠던 시기에 쓰였다고 한다. 그가 어려서 처음으로 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빅토리아 시대 전시실에서였다고 한다. 지금은 수많은 문학 작품, TV 다큐멘터리, 유튜브 동영상 등 새를 다른 멋진 매체들이 많아 방구석에서도 새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 책도 큰 역할을 해줄 테고 말이다. 마당과 동네 공원, 출근길, 휴가철 바닷가 등 새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던 새들조차 전부 존재감이 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새들이 살아가는 경이로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자연과 맺고 있는 깊은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새들을 지키고, 그들과 함께 공존하는 지구가 되도록 환경을 생각하는 우리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월이 지나 내 아들이 성장한 후에도 이 책상이 멀쩡히 보존된다면 아들에게 이것을 물려줄 것이다... 아이가 커 가정을 이룬다면 그 자식에게도 전해지겠지. 

역사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테지. 흠은 파내고 구실은 잘 덮으며.

그리고 언제까지고 내게는, 아니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             '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중에서, p.22


1944년 히로타 마사히로는 <소년 구락부>에서 주간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우등상을 받는다. 결의에 찬 소년의 연설은 군인들의 박수 세례를 받았고, 한 달 뒤, 우등 상품으로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 집으로 도착한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1980년, 벚나무 책상은 홍파동의 한 목조주택 서재로 옮겨지게 된다.  그리고 다시 40년이 지나 그 벚나무 책상은 나에게로 온다. 100년을 거스른 물건이라기엔 흠이 파인 곳도, 부식되거나 갈라진 흔적도 없이 멀쩡했기에, 나중에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기도 한 책상이었다. 그 책상을 둘러싸고 쥐의 두부가 무더기로 발견된다든지, 책상에 앉기만 해도 잠이 온다든지 하는 기묘한 일들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책상의 주인들은 대를 이어가며 크고 작은 악행을 벌이지만, 표면상으로 그들은 그 어떤 비난도, 멸시도, 형벌도 받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다. 작가는 말한다. '죄를 덮은 자리에는 꺼슬꺼슬한 흔적이 남는 법'이라고. 과연 그럴까. 


강이 내다보이는 신축 아파트와 증권사에서 일하는 남편, 드레스룸에 가득 찬 옷과 가방. 그녀에게 지금의 삶은 충족을 넘어 벅찼다. 새벽에 배송된 신선식품들로 남편을 위해 500칼로리가 조금 넘는 식단을 준비하는 걸로 시작된 아침 일과부터 늘 일정한 루틴으로 행동하는 남편의 리듬에 맞추어 사는 나날이 5년째 지속되고 있다. 그날은 미술품 수집을 하는 남편을 위해 경매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광고 배너가 눈에 들어온다. 삶이 버거우신가요? 흔한 광고 문구지만, 삶이 버거운 그녀를 홀리기에는 충분했고, 그렇게 '블루소셜클럽'이라는 경매장에 참석하게 된다. 그곳은 타인의 삶으 매수하거나, 자신의 삶을 매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낙찰받으면 그 동안 자신이 쌓아온 명성, 개인정보까지 이전 삶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매도자의 삶을 살게 된다. 왜 사람들은 남의 일생을 사려는 걸까. 




삶이 버거우신가요?

흔한 광고 문구지만, 삶이 버거운 그녀의 구미를 동하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녀는 홀린 듯 배너를 클릭한다.

타인의 삶을 매수하세요. 당신의 삶을 매도하세요.

광고 하단엔 상호와 전화번호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게 적혀 있다. 매사 경계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어느 순간에는 판단이 흐려지곤 한다. 그녀에겐 지금이 그러하다.              - '매일' 중에서, p.100~101


아무리 나쁜 짓을 벌여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죄의 흔적이 새겨진 책상이 100년째 후손에게 건너오면서 아무런 흠집조차 없는 것처럼, 그들의 삶도 그렇게 흘러간다. 하얼빈의 비밀 실험실에서는 눈도 귀도 없는 잿빛 덩어리가 태어난다. 바이러스 실험에 동원된 피험자가 낮은 그 생명체는 치댄 밀가루를 얼기설기 뭉쳐놓은 형태에 온몸이 잿빛 털로 덮인 짐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안드로이드가 등장하고,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복제하고, 기괴한 생명체가 실험실에서 태어나며, 전생을 믿는 기묘한 모임이 있으며, 로봇에게 밀려난 스턴트맨이 쓸쓸한 사투를 벌인다. 완벽한 악인도, 귀신도 없지만, 어쩐지 오싹하고 무서운 이야기들이었다. 작가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세 가지 시간의 축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역사와 죄의 흔적에 대해서, 삶을 욕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인간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책에 수록된 아홉 편의 작품에는 작가가 직접 쓴 아홉 편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소설을 쓰게 된 계기부터 배경과 창작의 과정, 주제에 대한 생각까지 담겨 있어 더 깊이 있게 작품을 이해하도록 해준다. 제목인 '인비인'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사람이 아닌 것, 혹은 사람이어야 마땅하나 사람이기를 스스로 멈춘 존재를 뜻하는 말이다. 작가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위태로운 존재들의 이야기를 '기담'이라는 장르적 형식을 빌려 기묘하고, 서늘하게 그려내고 있다. 강렬한 표지 이미지만큼이나 오싹한 일러스트들이 작품마다 수록되어 있고,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각 부마다 작가가 직접 고른 플레이리스트가 QR코드로 삽입되어 있다. 소설과 음악이 함께 흐르고, 독특한 일러스트들이 작품 속 여운을 깊고도 길게 만들어 준다. 덕분에 이 작품은 읽고, 보고, 듣는 세 가지 감각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무더운 이 계절을 시원하게 만들어줄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시간의 감촉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떤 삶이 힘들다 해서 그 말이 죽음을 바란다는 뜻은 아니다. 많은 경우 삶의 반대말이 죽음은 아닌 것이다. 경선도 마찬가지였다. 육십오 년이라면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셈이었다. 거기에 무엇을 보탤 수 있을까. 남은 삶에 더 나은 것이 있으리라는 희망. 더 좋은 것을 해보고 싶다는 미련은 그다지 없었다. 지금의 내 삶과 작별하는 일이 엄청나게 아쉬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죽음이 두려웠다. 왜 그럴까. 그 이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일까.              p.64


생의 어떤 순간 불현듯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낯선 도시의 골목 안에서, 가을로 접어든 어느 날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리고 은희경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종종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의 삶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시간의 밀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만난 <시간의 감촉>은 <새의 선물>(1995), <빛의 과거>(2019)를 잇는 은희경 시간 3부작의 완결편이다. 유년기, 청장년기에 이어 이번에는 노년기의 인물들을 그린다.


60대 여성 안나와 경선은 서로에게 무심한 자매이다. 특별히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지만, 일 년 정도는 안 보고 지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사이다. 안나는 예순사다섯 살 생일을 맞이했다. 정년퇴임 이후 서울을 떠나 신도시의 아파트로 이사온 지 일 년이 조금 지났고, 온갖 동원과 참견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요즘이 편하고 좋았다. 가족이 없고 경제활동도 끝났고 빚도 없고 만날 사람도 만들지 않는 안나에게 어떤 삶이 남아 있을까. 경선은 우연히 전남편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된다. 갱년기 클리닉에서 처방받은 여성호르몬 약을 먹고 있으며,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여지껏 큰 병 없이 살아왔는데, 노화로 인해 얻게 되는 자잘한 증상들이 낯설고 당혹스럽기만 하다. 특별한 용건이 있지 않는 한 만나지 않는 두 사람이 조우하게 된 곳은 뜻밖에 병원이었다. 




밤의 도시 너머 먼 불빛을 바라보며 안나는 생각했다. ‘첫’은 ‘가장 오래된’이다. 안나와 경선의 ‘첫’은 점점 ‘가장 오래된’으로 수렴해간다. 경선의 말처럼 그 모든 게 다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은 매 순간이 ‘첫’이다. 안나와 경선에게도 첫 순간은 수없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경선이 틀렸다. ‘우리의 첫’에 대한 기억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             p.357


안나와 경선은 십일 개월 육 일의 차이를 두고 태어났는데, 연도로만 보면 같은 해였고 둘 다 겨울 출생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만큼 예쁜 아기였던 경선은 나이들어 받는 푸대접을 부당하게 여기는 노인이 되었다. 평범한 외모로 태어나 사람들의 무관심에 익숙했던 안나는 노인이 되어 익명의 존재가 되어가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다. 성격도, 외양도, 살아온 삶도 너무 다른 두 자매는 종양수술을 받게 된 경선을 안나가 간병하게 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병원에서 안나는 생각한다. 만약 경선이 사라진 뒤 자신만 살아남게 된다면 감당해야 할 고독이 어떨지, 자신이 살아온 삶을 기억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두려울지에 대해서 말이다. 경선은 수많은 불면의 밤과 비관주의자가 되곤 하는 아침의 침대에서 수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했지만, 그 순간에 보게 될 사람이 안나라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이제야 비로소 서로를 제대로 마주하게 된 자매의 이야기는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펼쳐진다. 


시간은 우리 몸에 숨길 수도 지울 수도 없는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몸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한때는 그토록 찬란했던 빛이었건만 이제는 덧없이 사라져 돌이킬 수 없다'는 느낌이 노년의 나이에 가장 크게 와닿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사랑은 식어 버리고, 남루하고 무정한 일상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고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이를 먹는 일이 아닐까. 작가는 '몸은 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의 부화장이고 사랑의 꿈과 왜곡을 간직한 도서관'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그렇게 우리 몸에 남는 시간의 흔적들을 섬세하고, 다정하게 그려내고 있다. '현재가 최근이지만 가장 오래된 날이듯이', 아직 오지 않은 매 순간이 첫 순간이 된다는 설레임으로 앞으로의 시간들을 채워나가야겠다. 그리고 은희경 작가님이 오래 오래 작품을 써주시길 늘 응원하는 마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