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감촉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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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떤 삶이 힘들다 해서 그 말이 죽음을 바란다는 뜻은 아니다. 많은 경우 삶의 반대말이 죽음은 아닌 것이다. 경선도 마찬가지였다. 육십오 년이라면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셈이었다. 거기에 무엇을 보탤 수 있을까. 남은 삶에 더 나은 것이 있으리라는 희망. 더 좋은 것을 해보고 싶다는 미련은 그다지 없었다. 지금의 내 삶과 작별하는 일이 엄청나게 아쉬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죽음이 두려웠다. 왜 그럴까. 그 이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일까.              p.64


생의 어떤 순간 불현듯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낯선 도시의 골목 안에서, 가을로 접어든 어느 날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리고 은희경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종종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의 삶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시간의 밀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만난 <시간의 감촉>은 <새의 선물>(1995), <빛의 과거>(2019)를 잇는 은희경 시간 3부작의 완결편이다. 유년기, 청장년기에 이어 이번에는 노년기의 인물들을 그린다.


60대 여성 안나와 경선은 서로에게 무심한 자매이다. 특별히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지만, 일 년 정도는 안 보고 지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사이다. 안나는 예순사다섯 살 생일을 맞이했다. 정년퇴임 이후 서울을 떠나 신도시의 아파트로 이사온 지 일 년이 조금 지났고, 온갖 동원과 참견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요즘이 편하고 좋았다. 가족이 없고 경제활동도 끝났고 빚도 없고 만날 사람도 만들지 않는 안나에게 어떤 삶이 남아 있을까. 경선은 우연히 전남편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된다. 갱년기 클리닉에서 처방받은 여성호르몬 약을 먹고 있으며,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여지껏 큰 병 없이 살아왔는데, 노화로 인해 얻게 되는 자잘한 증상들이 낯설고 당혹스럽기만 하다. 특별한 용건이 있지 않는 한 만나지 않는 두 사람이 조우하게 된 곳은 뜻밖에 병원이었다. 




밤의 도시 너머 먼 불빛을 바라보며 안나는 생각했다. ‘첫’은 ‘가장 오래된’이다. 안나와 경선의 ‘첫’은 점점 ‘가장 오래된’으로 수렴해간다. 경선의 말처럼 그 모든 게 다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은 매 순간이 ‘첫’이다. 안나와 경선에게도 첫 순간은 수없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경선이 틀렸다. ‘우리의 첫’에 대한 기억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             p.357


안나와 경선은 십일 개월 육 일의 차이를 두고 태어났는데, 연도로만 보면 같은 해였고 둘 다 겨울 출생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만큼 예쁜 아기였던 경선은 나이들어 받는 푸대접을 부당하게 여기는 노인이 되었다. 평범한 외모로 태어나 사람들의 무관심에 익숙했던 안나는 노인이 되어 익명의 존재가 되어가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다. 성격도, 외양도, 살아온 삶도 너무 다른 두 자매는 종양수술을 받게 된 경선을 안나가 간병하게 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병원에서 안나는 생각한다. 만약 경선이 사라진 뒤 자신만 살아남게 된다면 감당해야 할 고독이 어떨지, 자신이 살아온 삶을 기억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두려울지에 대해서 말이다. 경선은 수많은 불면의 밤과 비관주의자가 되곤 하는 아침의 침대에서 수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했지만, 그 순간에 보게 될 사람이 안나라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이제야 비로소 서로를 제대로 마주하게 된 자매의 이야기는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펼쳐진다. 


시간은 우리 몸에 숨길 수도 지울 수도 없는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몸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한때는 그토록 찬란했던 빛이었건만 이제는 덧없이 사라져 돌이킬 수 없다'는 느낌이 노년의 나이에 가장 크게 와닿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사랑은 식어 버리고, 남루하고 무정한 일상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고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이를 먹는 일이 아닐까. 작가는 '몸은 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의 부화장이고 사랑의 꿈과 왜곡을 간직한 도서관'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그렇게 우리 몸에 남는 시간의 흔적들을 섬세하고, 다정하게 그려내고 있다. '현재가 최근이지만 가장 오래된 날이듯이', 아직 오지 않은 매 순간이 첫 순간이 된다는 설레임으로 앞으로의 시간들을 채워나가야겠다. 그리고 은희경 작가님이 오래 오래 작품을 써주시길 늘 응원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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