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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월이 지나 내 아들이 성장한 후에도 이 책상이 멀쩡히 보존된다면 아들에게 이것을 물려줄 것이다... 아이가 커 가정을 이룬다면 그 자식에게도 전해지겠지.
역사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테지. 흠은 파내고 구실은 잘 덮으며.
그리고 언제까지고 내게는, 아니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 '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중에서, p.22
1944년 히로타 마사히로는 <소년 구락부>에서 주간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우등상을 받는다. 결의에 찬 소년의 연설은 군인들의 박수 세례를 받았고, 한 달 뒤, 우등 상품으로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 집으로 도착한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1980년, 벚나무 책상은 홍파동의 한 목조주택 서재로 옮겨지게 된다. 그리고 다시 40년이 지나 그 벚나무 책상은 나에게로 온다. 100년을 거스른 물건이라기엔 흠이 파인 곳도, 부식되거나 갈라진 흔적도 없이 멀쩡했기에, 나중에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기도 한 책상이었다. 그 책상을 둘러싸고 쥐의 두부가 무더기로 발견된다든지, 책상에 앉기만 해도 잠이 온다든지 하는 기묘한 일들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책상의 주인들은 대를 이어가며 크고 작은 악행을 벌이지만, 표면상으로 그들은 그 어떤 비난도, 멸시도, 형벌도 받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다. 작가는 말한다. '죄를 덮은 자리에는 꺼슬꺼슬한 흔적이 남는 법'이라고. 과연 그럴까.
강이 내다보이는 신축 아파트와 증권사에서 일하는 남편, 드레스룸에 가득 찬 옷과 가방. 그녀에게 지금의 삶은 충족을 넘어 벅찼다. 새벽에 배송된 신선식품들로 남편을 위해 500칼로리가 조금 넘는 식단을 준비하는 걸로 시작된 아침 일과부터 늘 일정한 루틴으로 행동하는 남편의 리듬에 맞추어 사는 나날이 5년째 지속되고 있다. 그날은 미술품 수집을 하는 남편을 위해 경매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광고 배너가 눈에 들어온다. 삶이 버거우신가요? 흔한 광고 문구지만, 삶이 버거운 그녀를 홀리기에는 충분했고, 그렇게 '블루소셜클럽'이라는 경매장에 참석하게 된다. 그곳은 타인의 삶으 매수하거나, 자신의 삶을 매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낙찰받으면 그 동안 자신이 쌓아온 명성, 개인정보까지 이전 삶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매도자의 삶을 살게 된다. 왜 사람들은 남의 일생을 사려는 걸까.

삶이 버거우신가요?
흔한 광고 문구지만, 삶이 버거운 그녀의 구미를 동하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녀는 홀린 듯 배너를 클릭한다.
타인의 삶을 매수하세요. 당신의 삶을 매도하세요.
광고 하단엔 상호와 전화번호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게 적혀 있다. 매사 경계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어느 순간에는 판단이 흐려지곤 한다. 그녀에겐 지금이 그러하다. - '매일' 중에서, p.100~101
아무리 나쁜 짓을 벌여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죄의 흔적이 새겨진 책상이 100년째 후손에게 건너오면서 아무런 흠집조차 없는 것처럼, 그들의 삶도 그렇게 흘러간다. 하얼빈의 비밀 실험실에서는 눈도 귀도 없는 잿빛 덩어리가 태어난다. 바이러스 실험에 동원된 피험자가 낮은 그 생명체는 치댄 밀가루를 얼기설기 뭉쳐놓은 형태에 온몸이 잿빛 털로 덮인 짐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안드로이드가 등장하고,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복제하고, 기괴한 생명체가 실험실에서 태어나며, 전생을 믿는 기묘한 모임이 있으며, 로봇에게 밀려난 스턴트맨이 쓸쓸한 사투를 벌인다. 완벽한 악인도, 귀신도 없지만, 어쩐지 오싹하고 무서운 이야기들이었다. 작가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세 가지 시간의 축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역사와 죄의 흔적에 대해서, 삶을 욕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인간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책에 수록된 아홉 편의 작품에는 작가가 직접 쓴 아홉 편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소설을 쓰게 된 계기부터 배경과 창작의 과정, 주제에 대한 생각까지 담겨 있어 더 깊이 있게 작품을 이해하도록 해준다. 제목인 '인비인'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사람이 아닌 것, 혹은 사람이어야 마땅하나 사람이기를 스스로 멈춘 존재를 뜻하는 말이다. 작가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위태로운 존재들의 이야기를 '기담'이라는 장르적 형식을 빌려 기묘하고, 서늘하게 그려내고 있다. 강렬한 표지 이미지만큼이나 오싹한 일러스트들이 작품마다 수록되어 있고,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각 부마다 작가가 직접 고른 플레이리스트가 QR코드로 삽입되어 있다. 소설과 음악이 함께 흐르고, 독특한 일러스트들이 작품 속 여운을 깊고도 길게 만들어 준다. 덕분에 이 작품은 읽고, 보고, 듣는 세 가지 감각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무더운 이 계절을 시원하게 만들어줄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