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치 인류세 - 인간과 생태계를 잇는, 인류학의 새로운 자연사
애나 로웬하웁트 칭 외 지음, 김희정 옮김 / 해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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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삶의 과정을 역사적 시간 안에서 생각하게 한다. 유기체는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고, 이 변화는 유전자 변이, 후성유전학적 발현, 적응, 혹은 체내 미생물 군집을 포함하는 공생관계에 의해 생길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각각의 유기체는 모두 역사의 당당한 주체이자 주인공이 된다. 이들이 역사에 반응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안, 역사는 그들의 변화에 반응한다. 교란 생태학에서 지질학적 과정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계에도 이러한 방향으로 가는 다른 변화들이 있다.              p.192


상처 난 소나무 껍질 아래에 서식하는 붉은송진나무좀은 원산지인 북아메리카에서는 그다지 큰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런데 북아메리카에서 중국 산시성으로 대량 수출된 가공되지 않은 산업용 목재에 이 벌레들이 함께 실려 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중국의 렙토그라피움 프로세룸 진균 종을 만난 붉은송진나무좀이 공생관계를 이루어 나무들을 몰살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산업적 목재 무역이라는 인간 활동이 없었다면 해충들이 북아메리카에서 중국으로 옮겨갈 이유가 없었다. 한때 얌전하기 그지없던 식물이 온세상의 물을 질식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경우도 있다. 부레옥잠은 한때 식물원들이 가장 원하는 식물이었다. 그런데 관리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부레옥잠이 번식하자, 식물원들은 부레옥잠을 걷어내 강에 대량으로 던져 넣었고, 그 결과 강둑, 호수, 운하, 철도 도랑, 늪, 웅덩이, 저수지, 심지어 논에서도 이 식물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 모두 모두 인간이 교란시켜놓은 환경 덕분이었다. 


이렇게 특정 지역에서 인간의 인프라에 의해 변형되었지만, 더 이상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린 상황들이 바로 인류세 개념을 형성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인류세'란 '인간이 만들어 가는 새로운 지질시대'를 뜻하는 말로 인간이 자연을 교란하고 훼손시키면서 초래한 환경위기가 대두되면서 만들어진 표현이다. 열대야와 폭염이 지속되는 기후 현상을 비롯해서 지구온난화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은 이제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섰다. 인류가 파괴한 자연생태계를 복원하고, 지구의 지속 가능성을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책들을 꽤 읽어 봤는데, 새로운 시각으로 인류세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인류세는 전 지구적인 현상인 동시에 매우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특정 지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지 않은 채 인류세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책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지식 전통들과 함께 작업하고 그 전통들을 아우르는 큐레이션의 방식으로 '포개 쌓기'를 주장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지식을 한데 모음으로써 어떻게 포괄적인 이질성이 가능해져서 인류세 세계가 파열하고 재구성됨에 따라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고 구체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페럴 아틀라스'의 디지털 구조가 어떻게 패치적 인식론을 실행에 옮겨서, 불협화음과 예상치 못한 연결의 미학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했다... 연구자들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학문적 차이를 관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p.361~362


이 책은 조각보처럼 서로 분리된 채 인류세 현상을 보이는 특정 지역들을 가리키는 '패치'라는 단어를 사용해 '패치 인류세'라는 개념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세계 끝의 버섯>을 쓴 애나 로웬하웁트 칭이 현장의 인류학자들과 함께 쓴 이 책은 인류세 현상을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돕는 현장 안내서이기도 하다. 인류세 패치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규모로 일어나고 있기에, 이 책을 통해 환경 변화의 문제를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들은 댐, 운하, 단일 경작지 등 인간이 구축한 산업적 인프라가 빚어낸 낯선 생태적 현실을 조명하며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번성한 생물과 무생물이 야기시키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인간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동등한 행위자로 마주하는 ‘인간 너머’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다. 


인류세의 희망은 빅데이터가 아니라 '현장'에 있다고 말하는 이 책은 인간 너머 존재들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의식하고, 식별하고, 이름을 알고,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인간이 자초한 환경 재앙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준다. 전 세계에 걸쳐 생태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위기에 처한 것이 무엇인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지는 주체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패치 형태의 인류세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전 지구적 현상의 특수성과 그 특수성이 가지는 전 지구적 의미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인문학과 예술을 넘나드는 인류학자들이 진행한 일종의 패치 인류세 현장 보고서로 집필된 이 책은 결코 읽기 수월하진 않았지만, 막연하게 알고 있던 인류세라는 개념을 보다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자연과 인류세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세계의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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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와 욕조
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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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어떤 게 선한 행동인지 생각을 너무 많이 해.> 아들이 무기에 화약을 부어 넣는 걸 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우린 전쟁 중이야. 도덕이 낄 자리는 없어. 언제나 이긴 쪽이 옳은 법이지. 네가 할 수 있는 건 승리에 공헌하는 거야. 우리가 승리하면 우리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 거야. 반대로 패하면…… 우리 군의 일선이 어떻게 됐는지 너도 봤잖니, 안 그래?>              p.84


프랑스 혁명기, 시몽은 셀 없이 많은 전투에 참여했고, 전쟁은 그의 일상이 되었다. 화염에 휩싸인 도시들, 사람들이 마치 곤충이라도 되는 듯 쓸어버리는 총탄들... 아무리 정의로운 대의를 위해 싸운다지만, 이젠 전쟁이 지긋지긋해지고 있었다. 자유와 변화에는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라고, 병사들이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버티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전쟁이 끝이 난다. 시몬은 고향인 낭트의 집으로 향한다. 어서 부모님을 만나 푹 자고 일어나 전쟁 전의 세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달 전쯤엔가 도매상인들이 모조리 체포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거칠게 저항했던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고, 어머니는 감옥에 끌려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몽은 자신에게 모든 걸 가르쳐 준 사람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의 시몽이었지만, 이제 <복수>라는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무작정 총독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조심스럽게 소총을 장전하고는 눈 덮인 풀숲에 엎드려 총독이 오기를 기다린다. 드디어 총독이 등장했고, 시몽은 그를 죽이는 동시에 자신이 목숨을 잃는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창녀라고 소개하는 한 여자가 나타나 그를 막는다.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한 복수를 제안하겠다고, 이건 혼자서 완수할 수 있는 복수가 아니라고 말이다. 이유 없이 끌려간 사람들, 하루아침에 모조리 사라진 죄수들... 시몽의 개인적인 복수는 어느새 도시 전체의 비밀과 얽히기 시작한다. 자, 과연 시몽은 아버지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흐름의 힘, 매 순간 한결같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그 모든 물이 그가 거기에 빠져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자연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자연은 인간사를 개의치 않고, 그들의 결점이나 거짓, 잔인함이나 희망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흐름을 따라가며 상황에 따라 그들의 목을 축여 줄 수도 있고, 혹은 집어삼켜 죽일 수도 있었다. 그를 삼켜 버릴 뻔했던 그 힘 뒤에는 어떠한 의지도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p.614


이 작품은 조나탕 베르베르의 신작이다. 대중의 찬사 속에 화려하게 데뷔한 젊은 작가 조나탕 베르베르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아들이다. 국내에는 그의 첫 작품인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가 먼저 소개된 적이 있다. 심령술과 마술, 탐정 수사가 뒤얽힌 기이하고 매력적인 세계인 선보였던 전작에 이어 <불화의 아이들>이라는 미스터리 작품을 선보였고, <등장인물 연구 일지>에서는 인공 지능의 소설이라는 흥미롭고 시의적절한 소재를 색다르게 풀어낸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스릴과 반전이 있는 미스터리로서도 재미있었고, 하나의 창작물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메타픽션으로서도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 신작에서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잔혹한 내전으로 여겨지는 방데 전쟁을 배경으로 한 역사 미스터리를 선보인다. 철저한 조사와 취재를 바탕으로 자유와 평등의 상징이자 찬란한 승리로 기억되는 프랑스 혁명 뒤에 숨겨진 어둡고 추악한 진실을 들여다보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부제는 〈방데의 한을 풀어 준 남자의 이야기〉이다. 방데는 프랑스 서부의 지역으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잔혹한 내전으로 여겨지는 방데 전쟁의 발원지다. 시몽의 고향인 낭트를 비롯해 방데 전쟁 중 여러 지역에서 학살이 벌어졌고, 오랫동안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어 왔다. 우리의 4.3과 5.18처럼 말이다. 국가 권력에 의한 무참한 집단 학살이었던 방데 전쟁은 시대에 따라, 진영에 따라 그 평가가 갈라졌다. 이 전쟁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는 옮긴이의 말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니 참고해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역사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는 스토리에 페이지수도 만만치 않은 작품이지만, 아버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가독성 있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재능은 타고난 것 같다. 역사 스릴러를 좋아한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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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해부학 - 완전한 질서 너머 삶의 의미를 찾아서
가브리엘 웨스턴 지음, 김성훈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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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야단스러운 겨자색의 지방, 이 색깔이 맞자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내 망막을 강타하는 선홍빛의 동맥, 피막 아래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푸른 정맥, 깊은 심연에서 얼음처럼 시릴 정도로 하얀 뼈. 반면에 평범한 일상에서 피부라는 장막을 온전히 걸친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사람이 수술대에 반듯이 누워 수술실이라는 무지갯빛 낙원에서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내면을 드러내는 모습과 비교하면 얼마나 무미건조한가.             p.29


우리는 어딘가 아프거나 불편해지고 나서야 우리 몸 속 장기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질병 덕분에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우리 몸 속 우주에 대해, 우리가 무엇으로 이뤄진 존재인지에 대해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콩팥이 매일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뇌의 작동방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간의 재생능력은 얼마나 뛰어나며, 허파는 우리를 어떻게 세계와 연결해주며, 피부가 나를 바깥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 책은 뼈에서부터 자궁까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장기들의 해부학적 사실들을 따라가는 여정을 통해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낡은 해부학 교과서에서 삭제된 부분들을 채워넣으며 우리의 몸에 덧씌워진 사회적, 역사적 편견들을 날카롭게 해체한다. 수십 년 동안 수술실에서 쌓아온 외과의사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사유한다.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심장질환의 경험부터 쌍둥이를 임신하고 제왕절개 수술대에 누웠던 자신의 경험과 아들의 갑작스러운 뇌출혈까지... 저자 자신의 내밀한 삶까지 모두 담겨 있다. 흑색종을 비롯한 피부암부터 쌍둥이 제왕절개 수술, 생존기증자 간 이식수술 등을 관찰하고, 경험해온 외과의사에게도 질병은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지금 아무리 건강해도 누구나 늙어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내 몸이 무너졌을 때,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이다. 




모든 경험을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는 없다. 우리가 겪는 가장 깊고 힘겨운 순간 중에는 그저 완곡하게 암시하거나 파편화된 형태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런 것들을 과학의 냉철한 언어에 담기는 쉽지 않다. 그게 전부도 아니다. 객관과 주관, 직업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지성과 감각을 통합하려는 나의 그 모든 시도에도 끝내 바뀌지 않는 의학의 본질적인 모순이 하나 남아 있다. 질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정지화면처럼 마비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자를 보살피려면 그들로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서야 한다.               p.360~361


외과의이자 유명 TV프로그램 진행자인 저자는 부검실과 수술실뿐 아니라, 투석 전문 병원, 이민자격리센터 등 다양한 현장에서 사람들의 몸을 관찰하고 들어왔다. 해부학과 의학에 관한 책을 꽤 읽어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형식은 굉장히 독특했다. 무엇보다 '몸'을 고쳐야 할 기계적인 부품이 아니라 무수한 삶의 이야기가 새겨진 텍스트로 바라본다는 것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인간의 몸을 묘사하는데, 외과적 관점을 넘어서 그 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읽어내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환자가 되어 보고 나서야,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 할지라도 우리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수술실에서 시작해 다시 수술실에서 끝이 난다. 첫 장면에서는 여성의 시신을 해부하는 부검실을 통해 '죽음'을 보여주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고로 죽은 젊은이의 장기들이 또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 떠나는 과정을 통해 '삶'을 보여준다. 끝에서 또 다른 시작으로, 죽음에서 다시 삶을 살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도록 말이다. 서늘하고 차가운 의학 지식과 해부학적 사실들을 통해 섬세하고 다정한 연민과 위로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의과대학에 진학했다는 저자의 이력이 매 페이지마다 빛을 발하는, 의학책임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책처럼 읽히며 뭉클한 감동까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아름다운 책이다. 차가운 해부학의 언어로 어떻게 삶을 향한 뜨거운 찬가를 만들어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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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엘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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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응석받이 아이로 자랄 수만 있다면 성인기의 삶을 반쯤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앞서 우리가 연극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는데, 그건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한 그 상황의 기이함과 부자연스러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말을 좀 바꾸자면, 그 자리는 일종의 리허설 같았다. 우리는 늘 지금이 아니라 다음에 일어날 장면의 리허설을 하는 중이고, 나는 그 장면이 재앙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장면은 우리 모두를 변하게 하고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이를 결코 잊지 못할 터였다.              p.116~117


살면서 누구와 알고 지내는지는 꽤나 중요하다. 그로 인해 삶의 많은 경로들이 달라질 수 있고, 뜻밖의 인맥이 될 수도 있으며, 그 관계가 서로를 구원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68년 뉴욕 바너드 대학, 조지와 앤은 기숙사 룸메이트로 처음 만난다. 자신과 최대한 다른 세계에서 온 룸메이트를 특별히 요청했다는 앤은 부유한 명문가 출신으로 사실 흑인 룸메이트를 바랐다고 말한다. 앤은 왜 자신의 부류인 백인 상류층을 지독하게 증오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토록 마음을 쏟았던 것일까. 그에 반해 조지는 겨울이 여덟 달씩 이어지는 작은 소도시 출신으로 가족 중에 대학에 간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만성 피로에 지친 엄마는 가끔 손찌검을 해댔고, 자신은 절대로 엄마 같은 인생을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룸메이트가 아니었다면, 살면서 한 번도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극과 극의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털어 놓으며 우정을 키워 나간다. 조지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기에 앤을 바라보는 동경과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앤은 똑똑했고, 에너지가 넘쳤으며,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무수한 정치 집회, 궐기대회, 토론회에 나갔고, 무료 급식 센터 운영을 돕고, 노숙인 쉼터에서 자원봉사도 했으며, 도서관 문맹 퇴치 센터 강사도 하면서도 높은 학점을 받았다. 앤은 자신의 활동에 조시를 참여시키고 싶어했지만,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시간을 쓸 생각이 없었던 조시는 모두 거부했다. 조시는 대학 서점에서 일하고, 타이핑 일을 하며 점점 학교 수업에는 그만큼 멀어졌다. 조시는 앤의 에너지와 매사에 심혈을 기울이는 태도에 감탄했고, 부러웠다. 하지만 조지는 앤이 될 수 없었고, 앤도 조지처럼 살 수는 없었다. 




그 이후의 시기는 내게 지옥 불처럼 끔찍했어요.

순수한 낭만주의자들은 인생에 진정한 사랑은 한 번뿐이라고 믿죠. 평생 다른 사랑을 많이 하더라도 그것들은 유일한 사랑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죠. 난 그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만을 알 뿐이에요. 이제야 돌이켜보며 알게 되었죠.

배신의 맛은 어떨까? 내겐 레몬 절임 맛이었어요.

어던 것들은 글로 적어야만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죠.

아무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어요.             p.507


대학이 혼돈과 혼란의 본고장처럼 느껴진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이유로 학교를 떠나게 된다. 둘 다 환멸을 느꼈고, 대학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그 이유는 달랐던 거다. 앤은 여전히 세상을 바꾸려 하고 있었고, 조지는 로맨스를 찾고 있었다. 대학을 나와 조지는 대학의 에디터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앤은 사회 운동에 헌신적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건 앤이 먼저였고, 위층 남자와 만나고는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없던 조지는 앤에게 해묵은 질투심을 느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조금씩 멀어지다가 앤의 흑인 애인에 대해 사소한 대화를 나누다 크게 싸우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연락이 완전히 끊어진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시간이 흘러 앤이 경찰 살인죄로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게 되면서이다. 


시그리드 누네즈는 반전 시위, 민권 운동, 우드스톡, 대마초와 LSD가 혼재했던 1960년대 말의 시대를 배경으로 두 여성의 엇갈리는 삶과 우정의 연대기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누구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나와 대비되는 인물에 더 끌리게 마련이다. 다르기 때문에 더 가까워질 수 있고, 이해할 수 없기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정은 때로 사랑보다 더 깊고, 애틋하고, 잊혀지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두 주인공 외에도 여러 여성들의 삶과 다양한 관계들이 등장한다. 혼란스럽고 뜨거웠던 시대 속에서 여성들 간의 유대와 애정, 보살핌으로 서로를 구하고, 위로해주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한 시절이 끝나도 삶은 계속되고, 시대가 변해도 누군가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이 작품은 어쩌면 마지막이 아닐 그 존재들에게 보내는 사려 깊은 찬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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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영화관 ㅣ 환상 시리즈
호리카와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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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에 가서 자리에 앉았을 때의 즐거움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지. 자리에 앉아서 문득 뒤를 돌아보면 저 높은 곳에 자그마한 창문이 있는 거야. 극장 안이라는 게, 꼭 먼지가 떠다니잖니? ... 영사실에서 나오는 빛을 받아서 그 부분만 먼지나 티끌이 또렷하게 보이는 거야. 뭐, 먼지니 좋은 건 아니지. 하지만 어린 마음에는 마법 가루처럼 보였단다. 저 꼭대기 작은 곳에서 나오는 마법 가루가 영화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                 p.75


스미레는 아침 등교길에 노신사의 유령과 마주한다. 스미레가 유령을 보는 일은 신기하기는 하지만 결코 드문 일은 아니었다.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이미 학교는 지각이었다. 전철에서 내리는데, 옆 차량에서 내린 한 쌍의 남녀를 보며 깜짝 놀란다. 딱 봐도 불륜임을 알 수 있는 중년 남자와 상대 여성이었는데, 그 중년 남자가 바로 스미레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요즘 일주일에 절반은 집에 안 돌아오고, 늘 휴대전화를 붙들고 있는 것이 수상했는데, 역시나였던 것이다. 화가 나서 아버지와 불륜 상대의 뒤를 쫓아가는데, 그곳은 옛날부터 좁은 2차선 차도 양옆으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상점가였다. 


그렇게 그들을 쫓아가다 무심코 들어간 곳은 오래된 잿빛 빌딩의 로비였다. 무척 오래된 서양 영화 포스터와 한산한 매점, 충전재가 튀어나온 긴 의자와, 게르마 전기관이라는 금색 간판, 그곳은 비좁고 낡아 빠진 영화관이었다. 아버지의 불륜 현장을 맞닥뜨리고, 정신없이 달려가다 급기야 학교에도 가지 않고 영화를 보게 되다니... 열여섯 살 오늘날까지 바른길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스미레에게는 엄청난 하루였다. 그곳에서 영사 기사로 일하는 아름다운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만 스미레는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는데, 마침 학교에서 친구도 없고, 따돌림을 당하던 차에 학교 대신 일을 하고 싶다고 집에 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스미레는 낡은 영화관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그곳은 여러 모로 이상한 일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해해 주는구나......"

마리코 씨가 갑자기 힘차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세상에서 '돌아온 사람'을 찾지 못하면 지배인님이 책임져야 해...... 그렇게 되면 내가 게르마 전기관에 눌러앉은 것도 들통날 테고, 큰일이야......"

"그래서 지배인님이 그렇게 당황했던 거군요? 그럼 저희도 '돌아온 사람'을 찾는 건가요? 완전 미인 유령과 소녀 탐정이네요." 

무서우면서도 설레는 일입니다. 긴장과 흥분으로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p.135~136


사람이 죽기 직전에 인생에서 겪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바로 그 '주마등'을 보여주는 영화관이 있다면 어떨까. 매달 달빛이 사라지는 초승달 밤에 죽은 사람들이 심야 상영을 보러 영화관에 모여든다. 그리고 다들 자기 인생의 '주마등'을 보면서 천국으로 떠난다. '게르마 전기관'이라는 이름의 이 영화관에는 두 개의 관이 있는데, 1관은 지나간 영화들을 상영하는 일반 영화관, 2관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 존재하며 주마등을 상영하는 곳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망자들이 방문하는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여고생 스미레가 극장에서 벌어진 불가사의한 일과 같은 반 친구의 할머니 유령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호리카와 아사코의 '환상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신의 계약서 및 망자의 유품 등 ‘경계’를 오가는 우체국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졌던 <환상 우체국>에 이어, 이번에는 망자가 방문하는 영화관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환상 영화관>이다. 각각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전작에서 억울하게 살해당해 원령이 되었던 마리코가 등장해 시리즈로서의 매력도 놓치지 않는다. 판타지적인 배경에 호러와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적절히 섞여 들어간 이 시리즈는 가볍게 읽히지만, 따뜻한 여운을 남겨주는 힐링 드라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담은 핵심 메시지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면 도망쳐!"라고 말한다. 각자가 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대할 때 '도피'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 지금 일상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면, 이 작품을 통해 잠시나마 쉬어 가는 시간을 가져보길, 그리고 내일부터 다시 세상과 맞설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는 뜻이다. 오싹한 힐링이 필요한 당신에게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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