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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 인류세 - 인간과 생태계를 잇는, 인류학의 새로운 자연사
애나 로웬하웁트 칭 외 지음, 김희정 옮김 / 해나무 / 2026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삶의 과정을 역사적 시간 안에서 생각하게 한다. 유기체는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고, 이 변화는 유전자 변이, 후성유전학적 발현, 적응, 혹은 체내 미생물 군집을 포함하는 공생관계에 의해 생길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각각의 유기체는 모두 역사의 당당한 주체이자 주인공이 된다. 이들이 역사에 반응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안, 역사는 그들의 변화에 반응한다. 교란 생태학에서 지질학적 과정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계에도 이러한 방향으로 가는 다른 변화들이 있다. p.192
상처 난 소나무 껍질 아래에 서식하는 붉은송진나무좀은 원산지인 북아메리카에서는 그다지 큰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런데 북아메리카에서 중국 산시성으로 대량 수출된 가공되지 않은 산업용 목재에 이 벌레들이 함께 실려 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중국의 렙토그라피움 프로세룸 진균 종을 만난 붉은송진나무좀이 공생관계를 이루어 나무들을 몰살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산업적 목재 무역이라는 인간 활동이 없었다면 해충들이 북아메리카에서 중국으로 옮겨갈 이유가 없었다. 한때 얌전하기 그지없던 식물이 온세상의 물을 질식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경우도 있다. 부레옥잠은 한때 식물원들이 가장 원하는 식물이었다. 그런데 관리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부레옥잠이 번식하자, 식물원들은 부레옥잠을 걷어내 강에 대량으로 던져 넣었고, 그 결과 강둑, 호수, 운하, 철도 도랑, 늪, 웅덩이, 저수지, 심지어 논에서도 이 식물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 모두 모두 인간이 교란시켜놓은 환경 덕분이었다.
이렇게 특정 지역에서 인간의 인프라에 의해 변형되었지만, 더 이상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린 상황들이 바로 인류세 개념을 형성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인류세'란 '인간이 만들어 가는 새로운 지질시대'를 뜻하는 말로 인간이 자연을 교란하고 훼손시키면서 초래한 환경위기가 대두되면서 만들어진 표현이다. 열대야와 폭염이 지속되는 기후 현상을 비롯해서 지구온난화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은 이제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섰다. 인류가 파괴한 자연생태계를 복원하고, 지구의 지속 가능성을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책들을 꽤 읽어 봤는데, 새로운 시각으로 인류세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인류세는 전 지구적인 현상인 동시에 매우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특정 지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지 않은 채 인류세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책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지식 전통들과 함께 작업하고 그 전통들을 아우르는 큐레이션의 방식으로 '포개 쌓기'를 주장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지식을 한데 모음으로써 어떻게 포괄적인 이질성이 가능해져서 인류세 세계가 파열하고 재구성됨에 따라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고 구체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페럴 아틀라스'의 디지털 구조가 어떻게 패치적 인식론을 실행에 옮겨서, 불협화음과 예상치 못한 연결의 미학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했다... 연구자들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학문적 차이를 관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p.361~362
이 책은 조각보처럼 서로 분리된 채 인류세 현상을 보이는 특정 지역들을 가리키는 '패치'라는 단어를 사용해 '패치 인류세'라는 개념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세계 끝의 버섯>을 쓴 애나 로웬하웁트 칭이 현장의 인류학자들과 함께 쓴 이 책은 인류세 현상을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돕는 현장 안내서이기도 하다. 인류세 패치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규모로 일어나고 있기에, 이 책을 통해 환경 변화의 문제를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들은 댐, 운하, 단일 경작지 등 인간이 구축한 산업적 인프라가 빚어낸 낯선 생태적 현실을 조명하며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번성한 생물과 무생물이 야기시키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인간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동등한 행위자로 마주하는 ‘인간 너머’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다.
인류세의 희망은 빅데이터가 아니라 '현장'에 있다고 말하는 이 책은 인간 너머 존재들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의식하고, 식별하고, 이름을 알고,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인간이 자초한 환경 재앙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준다. 전 세계에 걸쳐 생태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위기에 처한 것이 무엇인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지는 주체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패치 형태의 인류세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전 지구적 현상의 특수성과 그 특수성이 가지는 전 지구적 의미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인문학과 예술을 넘나드는 인류학자들이 진행한 일종의 패치 인류세 현장 보고서로 집필된 이 책은 결코 읽기 수월하진 않았지만, 막연하게 알고 있던 인류세라는 개념을 보다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자연과 인류세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세계의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