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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해부학 - 완전한 질서 너머 삶의 의미를 찾아서
가브리엘 웨스턴 지음, 김성훈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야단스러운 겨자색의 지방, 이 색깔이 맞자 싶을 정도로 강렬하게 내 망막을 강타하는 선홍빛의 동맥, 피막 아래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푸른 정맥, 깊은 심연에서 얼음처럼 시릴 정도로 하얀 뼈. 반면에 평범한 일상에서 피부라는 장막을 온전히 걸친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사람이 수술대에 반듯이 누워 수술실이라는 무지갯빛 낙원에서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내면을 드러내는 모습과 비교하면 얼마나 무미건조한가. p.29
우리는 어딘가 아프거나 불편해지고 나서야 우리 몸 속 장기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질병 덕분에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우리 몸 속 우주에 대해, 우리가 무엇으로 이뤄진 존재인지에 대해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콩팥이 매일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뇌의 작동방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간의 재생능력은 얼마나 뛰어나며, 허파는 우리를 어떻게 세계와 연결해주며, 피부가 나를 바깥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 책은 뼈에서부터 자궁까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장기들의 해부학적 사실들을 따라가는 여정을 통해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낡은 해부학 교과서에서 삭제된 부분들을 채워넣으며 우리의 몸에 덧씌워진 사회적, 역사적 편견들을 날카롭게 해체한다. 수십 년 동안 수술실에서 쌓아온 외과의사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사유한다.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심장질환의 경험부터 쌍둥이를 임신하고 제왕절개 수술대에 누웠던 자신의 경험과 아들의 갑작스러운 뇌출혈까지... 저자 자신의 내밀한 삶까지 모두 담겨 있다. 흑색종을 비롯한 피부암부터 쌍둥이 제왕절개 수술, 생존기증자 간 이식수술 등을 관찰하고, 경험해온 외과의사에게도 질병은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지금 아무리 건강해도 누구나 늙어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내 몸이 무너졌을 때,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이다.

모든 경험을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는 없다. 우리가 겪는 가장 깊고 힘겨운 순간 중에는 그저 완곡하게 암시하거나 파편화된 형태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런 것들을 과학의 냉철한 언어에 담기는 쉽지 않다. 그게 전부도 아니다. 객관과 주관, 직업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지성과 감각을 통합하려는 나의 그 모든 시도에도 끝내 바뀌지 않는 의학의 본질적인 모순이 하나 남아 있다. 질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정지화면처럼 마비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환자를 보살피려면 그들로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서야 한다. p.360~361
외과의이자 유명 TV프로그램 진행자인 저자는 부검실과 수술실뿐 아니라, 투석 전문 병원, 이민자격리센터 등 다양한 현장에서 사람들의 몸을 관찰하고 들어왔다. 해부학과 의학에 관한 책을 꽤 읽어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형식은 굉장히 독특했다. 무엇보다 '몸'을 고쳐야 할 기계적인 부품이 아니라 무수한 삶의 이야기가 새겨진 텍스트로 바라본다는 것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인간의 몸을 묘사하는데, 외과적 관점을 넘어서 그 뒤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읽어내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환자가 되어 보고 나서야,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 할지라도 우리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수술실에서 시작해 다시 수술실에서 끝이 난다. 첫 장면에서는 여성의 시신을 해부하는 부검실을 통해 '죽음'을 보여주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고로 죽은 젊은이의 장기들이 또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 떠나는 과정을 통해 '삶'을 보여준다. 끝에서 또 다른 시작으로, 죽음에서 다시 삶을 살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도록 말이다. 서늘하고 차가운 의학 지식과 해부학적 사실들을 통해 섬세하고 다정한 연민과 위로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의과대학에 진학했다는 저자의 이력이 매 페이지마다 빛을 발하는, 의학책임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책처럼 읽히며 뭉클한 감동까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아름다운 책이다. 차가운 해부학의 언어로 어떻게 삶을 향한 뜨거운 찬가를 만들어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