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엘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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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응석받이 아이로 자랄 수만 있다면 성인기의 삶을 반쯤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앞서 우리가 연극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는데, 그건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한 그 상황의 기이함과 부자연스러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말을 좀 바꾸자면, 그 자리는 일종의 리허설 같았다. 우리는 늘 지금이 아니라 다음에 일어날 장면의 리허설을 하는 중이고, 나는 그 장면이 재앙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장면은 우리 모두를 변하게 하고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이를 결코 잊지 못할 터였다.              p.116~117


살면서 누구와 알고 지내는지는 꽤나 중요하다. 그로 인해 삶의 많은 경로들이 달라질 수 있고, 뜻밖의 인맥이 될 수도 있으며, 그 관계가 서로를 구원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68년 뉴욕 바너드 대학, 조지와 앤은 기숙사 룸메이트로 처음 만난다. 자신과 최대한 다른 세계에서 온 룸메이트를 특별히 요청했다는 앤은 부유한 명문가 출신으로 사실 흑인 룸메이트를 바랐다고 말한다. 앤은 왜 자신의 부류인 백인 상류층을 지독하게 증오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토록 마음을 쏟았던 것일까. 그에 반해 조지는 겨울이 여덟 달씩 이어지는 작은 소도시 출신으로 가족 중에 대학에 간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만성 피로에 지친 엄마는 가끔 손찌검을 해댔고, 자신은 절대로 엄마 같은 인생을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룸메이트가 아니었다면, 살면서 한 번도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극과 극의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털어 놓으며 우정을 키워 나간다. 조지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기에 앤을 바라보는 동경과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앤은 똑똑했고, 에너지가 넘쳤으며,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무수한 정치 집회, 궐기대회, 토론회에 나갔고, 무료 급식 센터 운영을 돕고, 노숙인 쉼터에서 자원봉사도 했으며, 도서관 문맹 퇴치 센터 강사도 하면서도 높은 학점을 받았다. 앤은 자신의 활동에 조시를 참여시키고 싶어했지만,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시간을 쓸 생각이 없었던 조시는 모두 거부했다. 조시는 대학 서점에서 일하고, 타이핑 일을 하며 점점 학교 수업에는 그만큼 멀어졌다. 조시는 앤의 에너지와 매사에 심혈을 기울이는 태도에 감탄했고, 부러웠다. 하지만 조지는 앤이 될 수 없었고, 앤도 조지처럼 살 수는 없었다. 




그 이후의 시기는 내게 지옥 불처럼 끔찍했어요.

순수한 낭만주의자들은 인생에 진정한 사랑은 한 번뿐이라고 믿죠. 평생 다른 사랑을 많이 하더라도 그것들은 유일한 사랑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죠. 난 그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만을 알 뿐이에요. 이제야 돌이켜보며 알게 되었죠.

배신의 맛은 어떨까? 내겐 레몬 절임 맛이었어요.

어던 것들은 글로 적어야만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죠.

아무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어요.             p.507


대학이 혼돈과 혼란의 본고장처럼 느껴진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이유로 학교를 떠나게 된다. 둘 다 환멸을 느꼈고, 대학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그 이유는 달랐던 거다. 앤은 여전히 세상을 바꾸려 하고 있었고, 조지는 로맨스를 찾고 있었다. 대학을 나와 조지는 대학의 에디터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앤은 사회 운동에 헌신적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건 앤이 먼저였고, 위층 남자와 만나고는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없던 조지는 앤에게 해묵은 질투심을 느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조금씩 멀어지다가 앤의 흑인 애인에 대해 사소한 대화를 나누다 크게 싸우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연락이 완전히 끊어진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시간이 흘러 앤이 경찰 살인죄로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게 되면서이다. 


시그리드 누네즈는 반전 시위, 민권 운동, 우드스톡, 대마초와 LSD가 혼재했던 1960년대 말의 시대를 배경으로 두 여성의 엇갈리는 삶과 우정의 연대기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누구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나와 대비되는 인물에 더 끌리게 마련이다. 다르기 때문에 더 가까워질 수 있고, 이해할 수 없기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정은 때로 사랑보다 더 깊고, 애틋하고, 잊혀지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두 주인공 외에도 여러 여성들의 삶과 다양한 관계들이 등장한다. 혼란스럽고 뜨거웠던 시대 속에서 여성들 간의 유대와 애정, 보살핌으로 서로를 구하고, 위로해주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한 시절이 끝나도 삶은 계속되고, 시대가 변해도 누군가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이 작품은 어쩌면 마지막이 아닐 그 존재들에게 보내는 사려 깊은 찬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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