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 - 시곗바늘 위를 걷는 유쾌한 지적 탐험
사이먼 가필드 지음, 남기철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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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가 우연인가, 아니면 모든 일은 정해져 있는 것인가? 우리가 만든 물건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것인가? 30초 일찍 경기장을 나섰다면, 좀더 세게 페달을 밟아 한 바퀴만 더 빨리 달렸다면.... 나를 수술했던 의사는 일찌감치 귀가하여 아내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서로 연결되어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시간 탓이 아니었다. 각자 스스로 결정한 일들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조정되어 온 현대적 스타일의 배합이다. 나는 이러한 배합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매번 새 책이 한 가득 도착할 때마다 생각한다. 왜 하루는 스물 네 시간밖에 안 되는 걸까. 책을 구입할 때,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도 같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항상 시계에 맞춘 삶을 살고 있으며, 좀처럼 오랫동안 시간의 여유를 갖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내고 있다. 나처럼 하루 24시간 중 많은 시간을 활용하려 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까 고심하기도 하고 말이다. 과거에는 수동적으로 시간을 소비했던 사람들이 요즘에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시간을 이용한다. 시간이 사람들의 일상사를 지배하는 모습을 초창기 시계를 만든 장인들이 보았다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사이먼 가필드의 이 책은 바로 이런 '인간들의 시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시간 측정, 시간 통제, 시간 판매, 시간에 관한 영화 만들기, 약속 시간 이행, 시간의 불멸화, 그리고 시간의 의미화를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들이 등장해 지난 250년간 시간이 어떻게 우리 일상에 파고들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최근에 시간이라는 복잡한 관념을 고대의 문명사를 통해 이야기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현대사를 거의 반세기 동안 연구해온 역사학자가 저자였던 터라 굉장히 흥미로운 역사서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반면 이 책은 시간을 비현실적인 존재가 아닌, 우리 삶의 주인공, 때때론 우리 가치의 유일한 척도가 되는 실질적인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 더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사고를 당했을 때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느끼는 그런 감각에서 지나치게 감아버린 시계태엽처럼 팽팽하던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시간에 관한 모든 것이 뒤집히는 경험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새 역사를 쓰기 위한 새롭지만 혼란스러운 달력을 만든 사례를 소개하면서, 숫자가 10시까지만 적혀 있는 벽시계도 등장하는 등 시간 흐름의 방향을 바꾸려는 프랑스의 오랜 전통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 따라 각각 다른 시간으로 공연되는 점을 보여주면서, 예술에 절대성이란 없으며 인간의 감정은 시간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 그날의 그 중요한 시간에 버넷은 라이카 카메라의 필름을 갈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사용하던 라이카는 필름을 끼우기가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카메라였다. 버넷 기자도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비행기와 시커먼 연기를 뚫고 뛰어오는 베트남 사람들을 보았다... '한 순간에...., 닉 우트가 정치와 역사를 초월한 장면을 포착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들이닥친 전쟁의 공포를 상징하는 장면이지요. 사진은 시간과 감정 등 온갖 요소를 포착하며 절대 지워지지 않습니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기차가 대륙을 가로지르기 시작하면서 기차 사고를 면하려 표준시간을 채택하게 된되면서 어쩔 수 없이 시간에게 우선권을 내주었던 사례도 있었고, 저장 장치의 용량 한계로 인해 대부분의 앨범이 재생시간 70분 내외로 정해진 기준에 맞춰서 음악을 감상하는 것처럼 우리가 항상 시간이라는 것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거기다 현재를 잡아두는 사진기자, 영화 속 장면들로 24시간을 표현한 영화감독에게서는 시간의 새로운 해석을 엿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들의 사례가 너무도 다양하고 무궁무진해서, “책 속에 들어있는 거대한 시간박물관이라는 표현이 너무도 와 닿는 느낌이었다. 철학적 개념도 과학 이론도 없이 오감으로 시간을경험하는 것은 오로지 사이먼 가필드라서 가능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읽을 거리들이 풍부해 너무도 재미있는 시간 여행이었다.

자동차 조립 라인에서부터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직접 시계 제조회사 작업실에서 시계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까지 등장하고 있다. 거기다 시계 산업을 지배하고 있는 스위스의 시계는 대체 무엇이 다른지, 시간에 대한 강박 관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운동 선수들의 사례와 어떻게 하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전략까지 수록되어 있다. 시간이라는 테마가 얼마나 폭넓은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지에 대한 그 결정체라고 느껴지는 이 책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금방 이야기에 빠져들 정도로 쉽고 재미있게 쓰여져 있어 누구라도 부담 없이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야말로 제목처럼 '시곗바늘 위를 걷는 유쾌한 지적 탐험'을 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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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7번째 기능
로랑 비네 지음, 이선화 옮김 / 영림카디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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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죽었어요."

"하지만 누가 그를 죽였다는 겁니까?"

"시스템이죠. 당연히."

푸코가 사용한 '시스템'이라는 단어는 바야르가 막연히 품고 있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기호학자이자 문예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 그는 타고난 관찰자이며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날은 이런 저런 생각들과 근심들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며 걷고 있었다. 바로 그 덕분에 사무실까지 불과 몇 십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트럭에 부딪히고 만다. 1980 2 25일 오후, 그렇게 롤랑 바르트는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결국 그렇게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것은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저자인 로랑 비네는 여기서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그게 우연히 일어난 사고가 아니었다면? 사고 직전 롤랑 바르트가 괴력의 비밀문서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세상을 뒤집을 만한 위력을 가진 문서였다면? 그렇다면 과연 누가 롤랑 바르트를 죽였을까. 라는 질문에서 이 작품이 시작된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정보국 수사관 바야르 경위가 파견되고, 그는 롤랑 바르트의 주변 인물들 탐문을 시작한다. 그리고 바르트의 죽음과 연루된 '실존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의 대가인 미셸 푸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해체주의를 주창한 자크 데리다, 기호학자이자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를 비롯해서 실제 언어학자와 철학자, 작가, 비평가 등이 등장해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당연히 바야르 경위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거의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들 대다수도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겠다. 기호학이라니, 그 이름만으로도 어쩐지 뜬구름 잡는 듯 실체가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학문처럼 들리지 않나. 나 역시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이라는 저서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상이나 이론 체계는 전혀 알지 못했던 평범한 독자이기에 초반을 견뎌내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주요 인물들이 떠들어내는 어려워 보이는 그 이론들을 전부 이해하지 않아도 이 소설을 즐기는데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그저 중도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저는 압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실마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저는 지식인이기 때문에, 작가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애쓰며 이 문제에 관해 사람들이 쓰는 모든 글을 읽으려고 애쓰며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 혹은 알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모든 진실을 알아 내려고 애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로랑 비네는 인상적인 데뷔작 <HHhH>이후 5년 만에 두 번째 작품으로 이번 작품을 내놓았다. <HHhH> 역시 역사 속 하이드리히 암살작전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에 대해 그리며 기존의 그 어떤 이야기와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소하고 낯설게 역사를 그리는 작품이었다. '역사적인 사실을 매우 정확하게 고증하는 소설도 있고, 실제 일어난 사실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소설도 있고, 왜곡까지는 아니지만 역사적 진실이라는 벽을 교묘히 우회하는 역사 소설도 있다.' 하지만 로랑 비네는 자신이 역사를 픽션으로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며, 매 순간 모든 장면이 실화라는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 날 수 있게 글을 쓰고자 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래서 <HHhH>에서는 대놓고 작가의 시선이 개입되는 부분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작가 노트와 소설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되는 구성이었는데, 이번 <언어의 7번째 기능>에서도 중간 중간 그런 부분이 있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 다음 장에서 '이 이야기에는 맹점이 있다. 이야기의 시발점이기도 하다'라고 단언하며 문제의 그 날에 대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실존 인물들은 절대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소설 속에서는 언제든 끄집어내어 밝혀낼 수 있다고 말하는 식이다.

그렇게 다혈질 수사관 바야르와 풋내기 기호학자가 20세기 최고의 지성들 사이에서 롤랑 바르트의 죽음과 숨겨진 괴문서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이 작품은 일반적인 형태의 스릴러, 미스터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처럼 굉장히 지적이고, 당대 최고 지성인들의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당돌함과 수수께께를 풀어가는 미스터리로서의 매력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호학과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 동안 만나본 적 없는 독특한 지적 유희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나 유명한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팩션이 또 있었나 싶을 만큼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작품이니,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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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보이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박현주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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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흑인 소년이 운동장으로 걸어 들어온 순간, 이언은 무언가 바뀌는 느낌을 받았다. 지진이 나면 이런 기분일까, 땅이 재배치되면서 믿을 수 없게 변했다. 학생들은 거의 1년을 함께하며 무리를 확고히 짓고 지도자와 추종자의 위계를 이루었다. 그 조직은 원활히 굴러갔다. 한 소년이 나타나서 모든 것을 뒤흔들기 전까지는. 단 한 번 공을 어마어마하게 멀리 차고, 단 한 번 소녀의 뺨을 만진 것만으로 질서가 바뀌었다.

1974년 워싱턴 교외의 한 초등학교. 백인 아이들로 가득한 그곳에 검은 피부를 가진 소년이 전학을 온다. 아버지가 가나 외교관인 그 소년의 이름은 오세이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우리 학교에 흑인 남자애라니,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반응인 것에 반해, 교내 최고의 인기 여학생인 다니엘라는 소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오세이는 자신을 ''라고 부르라고 했고, 다니엘라 역시 친구들 모두 자신을 ''라 부른다고 했다. 그 단순한 유대 덕분에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디는 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힘으로 아이들을 지배해온 이언 역시 새로운 전학생의 존재를 금방 알아본다. 이언은 가장 키가 크지도, 가장 빠르지도 않았고, 운동을 제일 잘하는 것도, 공부를 잘하지도,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있는 아이도 아니었지만, 가장 계산적이고 가장 교활한 아이였다. 새로운 상황에 가장 빠르게 반응하고, 그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꿀 줄 아는 아이였다. 그래서 늘 운동장을 지배했고, 자기 영역에 들어선 새로운 사람의 존재는 늘 바로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이언은 디가 오와 금방 가까워지는 걸 보고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 놓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흑인 소년과 금발 소녀의 우정을 파괴하기로 마음먹으면서, 그렇게 그들의 아주 길고도 끔찍한 하루가 시작된다.

 

이언은 더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슬슬 들었다. 독은 효과를 보이고 있었고, 이언은 이제 뒤로 물러나서 퍼지는 걸 구경만 하면 되었다. 그저 초연한 척 보이도록 조심하면서 관련이 있다는 걸 부인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이제 홈런을 차 줄 거야. 내가 이곳을 얼마나 확실히 지배하는지 똑똑히 보여 주지.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는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현대의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자신만의 문학관으로 재해석하여 다시 쓰는 기획이다.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의 다섯 번째 주자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원작자 트레이시 슈발리에이다. 그녀가 선택한 작품은 셰익스피어 전성기의 대표작인 <오셀로>이다. <오셀로>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선정적이고 격정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베니스의 무어인 오셀로가 이아고가 꾸민 계략에 의해 죄 없고 고결한 자신의 젊은 아내 데스데모나를 냉혹하게 살해하는 이야기는 트레이스 슈발리에에 의해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70년대 워싱턴의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좀 더 색다르고 신선하게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오셀로는 가나 출신의 소년 오가 되고, 데스데모나는 미국인 소녀 디, 책략가 이아고는 교활한 소년 이언이 되고,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는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소녀 미미가 된다. 이렇게 오셀로의 인물과 플롯을 고스란히 가져왔지만, 이 무시무시한 플롯이 초등학생들의 우정과 질투, 사랑이라는 관계로 변주되면서 독특한 재미를 발산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보다 훨씬 더 술술 쉽게 읽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는 짧은 탄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17세기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그것은 현대에도 여전히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는 현재 총 다섯 권의 작품이 출간되었다. 지넷 윈터슨의 <겨울 이야기>, 하워드 제이컵슨의 <베니스의 상인>, 앤 타일러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마거릿 애트우드의 <템페스트>,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오셀로>이다. 그리고 출간 예정인 작품들로는 에드워드 세인트오빈의 <리어왕>, 요 네스뵈의 <맥베스>, 길리언 플린의 <햄릿>이 있다. 특히 요 네스뵈와 길리언 플린이 어떻게 셰익스피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이야기를 그려낼지 너무 기대가 된다. 특히나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 가장 두려움이 가득한 작품이기도 하고, 가장 잔혹하게 아름다운 작품이기도 해서 북유럽 스릴러 작가가 새롭게 창조해낼 이미지가 너무 기대가 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고전을 고스란히 무대에 올려도 훌륭하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거나 공연 외에 음악이나 발레, 영화 등으로 변주되어도 여전히 그 가치가 있다. 그 중에서도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가 흥미로운 것은 여러 작가가 자신만의 색깔로 작품을 직접 고르고, 원작 희곡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시킨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마치 시리즈처럼 기획되어 이어지고 있으니,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는 프로젝트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것 같다. 에드워드 세인트오빈의 <리어왕>이 올해 5, 요 네스뵈의 <맥베스>가 올해 7월 출간예정이라고 하니 손꼽아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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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읽는 그랑 르노르망 카드
김세리 지음 / 북레시피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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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르망 카드를 읽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접해야 할 두 신화는 '이아손과 황금양털' 신화와 '트로이 전쟁' 신화입니다. 다시 말해, 어쩌면 모든 문학과 예술의 근본적인 주제인 '돈에 속고 사랑에 우는' 고전 판 '사랑과 전쟁'의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배신과 불륜, 사랑과 우애, 생존과 윤리에 대한 대표적 서사시들이지요.

저자는 프랑스 유학 생활 중 자주 가던 헌책방에서 이상한 카드 한 벌을 발견하게 된다. 꽤 묵직하고 큰 종이로 된 카드집이었는데, 개봉이 되어 있어 카드 몇 장을 꺼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카드 한 장 한 장이 지닌 묘한 매력에 빠져서 카드집을 구매하게 된다. 그녀는 카드를 해독해보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꼈고, 덕분에 이렇게 한국에 책으로 소개가 된다. 54장으로 구성된그랑 르노르망 카드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이미지들을 읽어나가며 미래를 예견하는 매우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외견만 보자면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어다 보면 타로 카드와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이다. 기원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타로카드에 비해 르노르망 카드의 배경은 '이아손과 황금양털' 신화와 '트로이 전쟁' 신화이며, 그 밖에도 다른 지역의 신화 및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다양한 테마들을 엮어 카드를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한때 타로카드며 그 밖에 여러 점술카드들이 유행처럼 번졌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관련 책들도 쏟아졌던 기억이 난다. 다양한 그림이 그려진 78매의 카드를 뽑아서 문제를 분석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일종의 점술인 타로카드는 그것을 위한 카페가 있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었다. 타로카드의 그림들은 운명의 수레바튀부터 정의의 여신, 죽음의 여신, 교수형을 당한 죄인 등 세상의 만물을 대변하고 있어 수만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누구나 쉽게 도전할 수 있다는 느낌도 있었고, 그만큼 재미도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된 그랑 그로르망 카드는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의 카드점술가였던 마리 안느 아델라이드 르노르망이 창안한 것인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지력이 있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로베스피에르, 장 폴 마라, 나폴레옹의 부인 조제핀 등을 고객으로 두며 유명해진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났고, 우연히 죽으며, 우연히 무사하다가도 우연히 사고를 당합니다. 우연히 사랑에 빠지는가 하면, 우연히 재회하고, 때론 우연히 헤어져 외딴곳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마치 우리가 카드를 뽑는 행위처럼 전부 우연일 수 있겠지요.

이 작품은 책과 카드가 한 세트로 이루어진 카드 해독 지침서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화 속 이야기와 더불어 그 문화와 역사 속 이야기들이 풍부해 인문학적인 재미까지 주고 있다. 저자는 그랑 르노르망 카드가 단지 미신을 믿는 사람들의 맹목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타로 카드와 더불어 서양 문화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그만큼 흥미로운 대목이 많은 책이기도 했다. 우선 이 카드를 창안한 마드무아젤 르노르망에 관한 것부터, 카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등 카드 해독의 기본 지식부터 배열법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특히나 그랑 르노르망 카드의 배경이 되는 다섯 가지 주제들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아손과 황금양털 신화, 트로이 전쟁 신화, 연금술 혹은 결혼, 뜻밖의 사건들, 시간의 질서와 별자리.. 그래서 이 책에서는 트럼프의 모양과 순서에 따라 카드를 해설하는 게 아니라 주제별 구분에 따라 그에 속하는 카드를 해설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신화 속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그에 속하는 카드의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도록 진행되고 있어 카드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야기로 파악하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운명의 원형적인 이야기인 신화뿐 아니라 별자리, 꽃말, 흙점, 알파벳점 등 보조적인 상징코드들도 함께 소개되고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자신의 운명을 점쳐보고 싶은 이들에게, 혹은 단조로운 일상에 설레는 비밀을 갖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아마도 타로카드 만큼이나 재미있고, 또 그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부분이 많아 만족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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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소년
오타 아이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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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은 사람은 교도소에 간다. 교도소에 가서 죗값을 치른다. 이십삼 년 전 그 여름, 소마와 나오는 세계를 믿고 있었다. 죄를 지은 인간이 법의 엄정한 심판을 받은 후 죗값을 치르는 세계를.

그러나, 그 세계는 옳지 않았다.

방송국 직원, 고스트 라이터 시절을 거쳐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는 야리미즈에게 어느 날 23년 전 사라진 아들을 찾아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야리미즈는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사라진 아이를 찾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일인가 싶어서 의뢰를 거절하려다 300만 엔이라는 착수금을 덥썩 받아버려 일을 맡게 된다. 그런데 일을 의뢰한 여인은 그 길로 집 열쇠를 그에게 맡기고는 사라져 버린다. 이십삼 년 전에 열세 살 나이로 실종된 미즈사와 나오는 초등학교 정문 근처에서 깜박 두고 온 게 있다면서 돌아갔는데, 그 뒤로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집에도 들르지 않았으며, 당일 오후 집에서 한참 떨어진 강가의 상점에서 잠깐 목격되고, 강가에 서 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오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강에서 조난을 당했을 경우 혹은 사고의 경우 시체가 발견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고, 유괴라고 보기에도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남겨진 나오의 책가방에는 실종 당일은 금요일 시간표가 아니라 토요일 시간표대로 책이 들어 있었다. 야리미즈는 조사원 슈지와 함께 실종 당시 나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어떤 사건 때문에 형사과에서 교통과로 좌천된 소마는 주택가를 돌며 수상한 차량 목격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며칠 전 열세 살 난 소녀가 도서관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몇 분 사이에 없어진 것이다. 그는 아이가 사라진 현장을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도서관 근처를 둘러보다 소녀가 기대어 있었다는 나무에서 무슨 딱딱한 것으로 새긴듯한 표시를 발견한다. 그것은 이십삼 년 전 여름, 나오가 실종되던 장소에서도 있었던 표시였다. 그는 본부로 달려서 담당 순사부장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만, 본부에서 이미 용의자에 대해 세운 방침을 바꾸지 않는다는 말만 듣는다. 유괴 당한 아이가 최고검찰청 차장검사였던 이의 손녀라 이번 사건은 속전속결이 지상명령이었고, 벌써 용의자 체포를 전제로 공개 수사로 전환될 거라는 거였다. 사실 소마는 이십삼 년 전 여름, 나오와 같은 동네에서 그의 세살 터울 동생 다쿠와 셋이 친하게 지냈었다. 순직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형사가 된 지금까지도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던 소마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소녀의 실종 사건과 과거 친구 나오의 사건에 연관성이 있음을 직감하고, 두 사건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학 동창인 야리미즈가 자신과 같은 사건을 조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소마와 야리미즈, 슈지 세 사람은 정보를 교환하며 힘을 합치기로 한다.

 

", 현재 일본의 재판 현장에서 '열 명의 진범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라'는 격언은 그림의 떡이지. 수사관은 자신이 세운 가설에 맞춰 용의자를 체포하려고 혈안이고, 검찰관은 기소한 피고인에 대해 유죄판결을 얻어 내려고 기를 쓰고, 재판관은 사건 처리 선수를 올리는 데 급급하고. 그 결과 어쩌다 원죄가 발생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책임을 묻지도 않아."

이십삼 년 전 열세 살 소년의 실종과 현재 열두 살 소녀의 유괴 사건이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 과거에 있었던 원죄 사건이 그 중심으로 떠오른다. 그렇게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원죄 사건'이란 죄를 짓지 않은 무고한 사람이 경찰과 검찰, 그리고 재판부의 유기적인 범죄 조작으로 죄를 뒤집어쓴 경우를 말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은 단 한 순간도 페이지를 놓을 수 없도록 몰입하게 만들어 주고, 사법체계의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작가의 예리함으로 공감과 이해를 넘어 분노하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형사재판의 대원칙, '열 명의 진범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라'는 과연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사회는 개인이 저지른 범죄를 공정하게 조사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판단해, 제대로 처벌하고 있는 것일까. 극중 한 인물의 말이 머릿속에 자꾸 맴도는 기분이다. '한 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지키기 위해 열 명의 진범을 놓쳐도 상관없는 그런 사회를, 정말 세상이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냐'는 말. 그렇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회를 세상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지 묻는다면, 글쎄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잇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현대 사회는 과연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위해 열 명의 범인을 포기할 수 있는가.

현대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을 다루고 있는 작품은 꽤 만나왔지만, 오타 아이의 이 작품은 단순히 원죄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마도 일본 최고의 형사드라마 시리즈의 각본가로서의 경력 때문이겠지만 구성도 훌륭하고, 캐릭터, 반전, 드라마 모두 흠잡을 데 없이 멋진 작품이다. '열 명의 진범을 잡기 위해 한 명의 무고한 피해자가 희생되어도 아무 상관없는 사회'를 너무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어 그 무고한 희생이라는 것이 시스템 속에서 필연적으로 계속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을 누구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 세계가 그런 사회라면, 사회도 그 한 명의 피해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드라마는 너무도 이해가 되어 함께 분노하고, 공감하고, 그러다 먹먹한 감정으로 슬픔에 휩싸이고 말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1 10은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래야 세계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의 제대로 된 의미가 보여지는 후반부에 이르면 마음이 아프고, 씁쓸해지고 만다. 특히나 사법 체계에 대한 신뢰를 위협하는 원죄 사건이 단지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픽션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사회의 부조리에 맞선 소년의 마음이 허구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실화보다 더 사실처럼 리얼하게 그려진 이 작품을 통해서 진실 뒤에 숨겨져 있는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이 사회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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