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어디에도 없었던 방법으로
테라오 겐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2월
평점 :
품절


 

 

 

이 일련의 과정을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며, 어머니의 사고를 간단하게 정리해서도 안 된다. 이 세상에는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도, 두려움을 딛고 인생의 즐거움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문제나 도전의 기회와 마주했을 때, 그것의 가능 여부를 고민하지 않는다. 누군가그건 무리야.”라고 말한다면?” 하고 반문할 테니까.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일부가 세상에 혁신을 일으킨다.   p.65~66

 

요리와 사람의 품격을 높여준다는 주부들의 워너비 주방 아이템들이 있다. 미니멀한 디자인, 감각적인 컬러로 주방을 화사하게 만들어줄 스메그의 컬러풀한 냉장고, 아날로그 감성이 반영된 아이코나 빈티지 커피머신, 프랑스 최고급 주방 오븐 브랜드 라꼬르뉴의 클래식하고 우아한 오븐... 그리고 죽은 빵도 살려낸다는 발뮤다의 토스터 등이다. 발뮤다의 제품들은 꼭 주부가 아니더라도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자연의 바람을 그대로 구현했다는 선풍기 그린팬이나, 세련된 디자인의 전기주전자 발뮤다더팟 등등.. 제품들이 하나같이 아름답고 새롭다는 평가를 받는 발뮤다는 이른바 '일본 가전업계의 애플'이라고 불리는 기업이다.

이 책은 파산 위기의 1인 회사였던 발뮤다가 사람들을 끊임없이 매료시키는 제품을 내놓는 혁신 기업이 되기까지, 창업자 테라오 겐의 인생 스토리와 기업 경영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린팬을 출시하고 세 명이었던 직원은 팔 년이 지나 100명이 넘었고, 매출은 이백 배 가까이 불었다. 발뮤다의 제품은 독일 레드닷 어워드에서 3년 연속 수상했고, iF 디자인 어워드, 굿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했다. 그린팬을 출시한 이후 발뮤다의 모든 제품이 디자인상을 받았다. 사람들을 끊임없이 매료시킨 독창적이고, 놀라운 발뮤다의 정신이 궁금해졌다.

 

 

 

 

철이 들고부터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작문, 공작, 그림, , 오토바이 개조, 소설,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은 매일매일 곡을 만들었다.

창조에는 결과가 요구된다. 취미였다면 큰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 나에게는 단 한 번도 취미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진지했다. 내 손으로 만들어낸 무언가가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그것을 기점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p.163~164

 

테라오 겐의 어린 시절, 그리고 청년 시절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던 시간들이었다. 그가 발뮤다를 창업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이 책의 중반을 훨씬 넘어서야 만날 수 있다. 전반부에는 그의 특이한 인생 역정이 담겨 있는데, 열일곱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년간 에스파냐, 이탈리아, 모로코 등 지중해를 따라 여행을 했고, 경비는 불의의 사고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남겨진 보험금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와서는 뮤지션의 길로 들어서 10년간 기타를 치며 록 밴드 생활을 했다. 영웅이 되고 싶었고 록스타가 되겠다고 말했던 그였지만, 스타로 살고 싶었던 그의 꿈은 연예 기획사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한 순간에 무너졌다. 그러다 결국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형태를 실현해내기 위해 틈나는 대로 가스가이 제작소라는 곳에서 제품 만드는 것을 배웠고, 2003년에 디자인 전자제품 기업 발뮤다를 창업하게 된다.

인생이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테라오 겐 역시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나마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현재 가전제품을 만드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물론 발뮤다 역시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알루미늄과 금속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깎아 부품을 만들다 보니 대량생산이 불가능했고, 값비싼 원자재를 사용하다 보니 고가로 출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만든 제품이 팔리지 않게 되자 결국 파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의 발뮤다를 일으켜 세우는 계기를 만들고, 지금의 발뮤다를 있게 한 '그린팬'에 대한 아이디어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 또한 매우 흥미진진했다. 이것은 절대 우연히, 운이 좋아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발뮤다라는 놀라운 기업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기까지의 전반부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발뮤다의 핵심에는 예민한 감수성과 주변의 시선을 태워버릴 만큼 뜨거운 열정이 있었고, 그것은 불가능을 두려워하지 않는 테라오 겐의 삶을 관통하는 도전정신과 맞닿아 있으니 말이다.

 

 

살다 보면 실패도 많이 하게 되고, 힘겨운 일들도 자주 발목을 붙잡는다. 하지만 테라오 겐의 말대로 우리에게는 망각이라는 탁월한 능력이 있지 않은가. 모든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도, 불가능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든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지금 당장, 바로 오늘부터 시작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냐의 유령 에프 그래픽 컬렉션
베라 브로스골 지음, 원지인 옮김 / F(에프)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여기.... 여기 얼마나 있었어?

나도 모르겠어. 지금이 몇 년도야?

2019.

어디 보자, 100?    p.21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지만 여전히 사회 주류는 백인 이고 수없이 많은 차별과 혐오가 작동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소위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인종·계층에 대한 편견과 혐오는 사회 곳곳에서 차별로써 존재하고 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러시아 이민자 출신 고등학생 아냐의 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고작 다섯 살이었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괴롭힘을 당했었다. 아냐는 뚱뚱했고, 옷도 중고 매장에서 사 입었고, 러시아 억양도 남아 있었으니 누가 봐도 그들과는 '달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었고, 지금은 좀 더 좋은 옷을 입고, 억양을 고쳤고,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미국 학생처럼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아냐는 여전히 친구가 별로 없었고, 살 빼고 예뻐져서 잘나가는 애들이랑 어울리고 싶어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냐는 딴 생각에 잠겨 걷다 숲 속에 있는 우물에 빠지게 되고, 그 안에서 외로운 유령을 만나게 된다. 유령은 우물 안에서 100년 동안 갇혀 있었고, 그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라 아냐의 등장을 굉장히 반가워한다. 아냐는 유령의 도움으로 지나가던 사람에게 도움 요청을 해서 그곳을 벗어나게 되고 학교 화장실에서 유령을 다시 만나게 된다. 자신의 뼈가 있는 곳을 떠날 수 없다던 유령은 아냐의 가방에 잘못 담긴 뼈 한 조각 덕분에 밖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유령은 아냐가 시험 문제를 푸는 것을 몰래 도와주고, 관심 있는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등 아냐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게 도와 준다.

 

 

 

에밀리.... , 진작에 물었어야 했는데, 그 우물에는 어떻게 빠지게 된 거야?

난 살해당했어.    p.89

아냐는 유령인 에밀리의 말대로 하니 진짜 성적도 오르고, 예쁘단 소리도 듣고, 짝사랑하던 남자에게도 관심을 받기 시작하게 되어 기분이 좋다. 그렇게 아냐는 에밀리와 친구가 되어 오래 전 그 우물에 어떻게 빠지게 된 건지 묻는데, 에밀리는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 살인자는 에밀리의 부모 두 분 역시 살해했고, 이후 사람들에게 발각되지도 않은 것 같다고. 안타까운 마음에 아냐는 당시의 살인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해보고, 범인이 어떻게 됐는지 자신이 알아내 보겠다고 한다. 그런데.. 100년 살인 사건의 진상은 아냐가 알고 있던 그것과 전혀 달랐다. 그리고 어리버리하고, 순진해 보였던 유령 에밀리는 점점 더 낯선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과연 에밀리의 진짜 정체는 무엇이며, 아냐의 학교 생활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베라 브로스골은 우물과 유령이라는 소재로 성장기에 누구나 느낄 법한 열등감과 불안감을 깊이 있게 표현해 내고 있다. 평범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던 소재였는데, 생각보다 흥미진진했고, 나름의 반전도 있었고,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흐름과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성장기 소녀의 심리를 잘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유수의 언론으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그래픽노블 부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아이스너 상까지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어른들의 만화라고도 불리는 그래픽 노블은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띠며, 보통 보통 소설만큼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그래픽노블이 예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문맥적으로 이해하기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거나, 이미지들이 너무 상징적이어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 작품은 누구라도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도록 속도감 있고 명징하게 전개되는 점이 장점이다. 성장소설로 시작해 미스터리로 흘러 가다 중반 이후에는 공포물처럼 오싹한 단계를 거쳐 다시 성장소설로 마무리되는 구성이라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도 이 작품만의 장점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화심리학 - 마음과 행동을 탐구하는 새로운 과학
데이비드 버스 지음, 이충호 옮김, 최재천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수유하고 양육하고 보호하고 먹이는 것은 아주 소중한 생식 자원이다. 소중한 자원을 가진 쪽은 그것을 아무렇게나 낭비하지 않는다. 과거의 진화 역사에서 여자는 섹스를 한 결과로 큰 투자를 하는 모험을 무릅썼기 때문에, 진화는 배우자를 까다롭게 고르는 여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배우자 선택을 까다롭게 하지 않은 여자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 번식 성공률도 낮을 뿐만 아니라, 자녀 중에서 생식 시기까지 살아남는 비율도 낮았다.    p.184~185

사람을 연구할 목적으로 만든 심리학이라는 과학 분야에는, 생각보다 종류가 아주 많다. 마음이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연구하는 '인지심리학',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과 관계를 연구하는 '사회심리학', 사람이 평생 동안 심리적으로 어떻게 변해가는지 연구하는 '발달심리학', 개인주의 문화와 집단 문화 사이의 차이를 연구하는 '문화심리학', 마음의 기능 장애를 연구하는 '임상심리학' 등이다. 하지만 이 모든 심리학들은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고, 진화심리학은 이 모든 하위 분야들을 통합할 만한 이론이다. 진화심리학의 가장 흥미진진한 측면이 바로 사람의 행동을 통합적으로 기술하려는 노력에서 생물학, 인류학, 심리학과 그 밖의 행동과학 분야들에서 나온 증거와 설명을 통합하는 틀을 약속한다는 데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기본적 생존’, ‘()과 짝짓기’, ‘양육과 친족’, ‘집단 생활의 영역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왜 사람들이 뱀을 무서워하는지부터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동과 심리의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분량이 방대하지만 그만큼 흥미로운 대목도 많은 책이다. 왜 배가 부른데도 달콤한 후식을 먹을까? 고모보다 이모가 조카를 더 아끼는 것은 왜일까? 여자는 왜 목소리가 낮은 남자를 좋아하는가? 남자는 왜 긴 머리 여자를 좋아하는가? 사람의 행동은 단순한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드는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진화심리학은 이러한 인간 본성과 행동에 대한 수수께끼들을 푸는 과학이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식은 부모에게 일종의 운반 수단이다. 자식은 부모의 유전자를 그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수단이다. 자식이 없다면 그 사람의 유전자는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 유전자 운반 수단으로서 자식이 이렇게 소중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연 선택이 부모에게서 자식의 생존과 번식적 성공을 보장하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기제를 선호할 것이라고 보는 게 당연하다. 짝짓기 문제를 제외한다면, 자신의 자식이 살아남아 번성하도록 보장하는 것만큼 중요한 적응 문제는 없다.    p.323

진화심리학의 토대를 세운 핵심적인 연구가, 데이비드 버스(David Buss)가 특히 관심을 가지는 인간 행동은죽이기짝짓기. 그는 1984년부터 약 5년 동안 전 세계 6개 대륙 및 5개 섬, 37개 문화권에 사는 1 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하여,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성적 행동과 심리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 책은 그런 데이비드 버스가 진화심리학을 종합하기 위해 쓴 책으로, 아직까지 체계적인 진화심리학 교과서가 없었던 1999년 초판 출간되어 미국과 유럽 대학에서 꾸준히 활용되고 있으며, 판을 거듭하며 내용을 보강하고 있다. 진화심리학을 탄생시킨 과학 운동부터 현대적인 진화론의 체계가 잡히기까지 진화론의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보고, 진화론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오해를 살펴본다. 현대 진화심리학의 이론적 기초부터 자세한 자세한 연구 내용들 및 가장 중요한 통찰과 최신 동향까지 집대성한 책이다.

 

 

마치 전공 서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커다란 판형에 두툼한 페이지를 자랑하는 양장본이지만, 생각보다 술술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었다. 진화심리학에 관심이 있다면,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흥미로운 사례가 가득해 지루할 틈이 없을 것 같다. 진화한 심리 기제로 바라본 배우자 선호 방식에 대한 항목도 흥미로웠는데, 실제로 여성이 남성보다 배우자의 경제적 자원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에 반해 남자는 외모와 매력을 중요시하는 것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월등히 많은 보살핌을 자식에게 제공하는 가에 대한 다양한 가설들이 있었는데, 사람의 양육 행동을 아주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내용들이라 역시 흥미롭게 읽었다.

 

우리가 사회적인 통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부분들이 사실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매우 과학적인 사례들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부모와 자식은 서로의 가치를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은 씁쓸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자식은 부모의 유전자를 운반하는 수단이지만, 부모는 자식에게 점점 가치가 없어지는 반면, 자식은 부모에게 점점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가 번식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점점 사라져 가니, 부모에게 어른이 된 자식의 가치는 자식에게 부모가 지닌 가치보다 훨씬 크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에 따라 명백한 예측 한 가지가 나오는데, 이는 가치가 적은 사람은 살해당할 위험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 자식이 부모를 죽일 가능성이 부모가 성인 자식을 죽일 가능성보다 크다며, 그에 따른 사례와 통계를 보여주는데, 섬뜩하고 오싹하기도 했다.

 

심리학과 진화생물학의 현대적인 원리들을 종합해 삶의 문제들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진화심리학은 현대인이 반드시 알아야 할 학문이자 21세기 통섭 연구의 미래이다.  이 책은 종종 악용되거나 오해 받는 진화심리학의 오해를 풀고 미래의 전망을 밝히는 진화심리학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이러한 진화심리학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예측해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 지도
앤드루 더그라프.대니얼 하먼 지음, 한유주 옮김 / 비채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다음 장의 지도는 베넷 부인의 세상을 보여준다. 물론 엘리자베스의 세상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지도를 그릴 수도 있겠지만, 관계와 결렬, 깊게 벌어진 틈과 균열은 변하지 않고 남을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위치를 (그리고 상황을) 안다.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p.43

소설이란 작가가 만들어낸 특정 시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러다 보니 가상의 공간과 인물들이 움직이는 동선을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그려 보게 된다. 때로는 그걸로도 부족해 직접 인물 관계도를 그린다거나 이야기 속 배경이 되는 장소의 지도를 그리게 될 때도 있다. 이는 책이 두툼하고, 등장 인물이 많고, 플롯이 복잡할 수록 더욱 효과적인 읽기의 방법 중 하나이다. 사실 전체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 이것 큼 빠르고 기억하고 쉬운 방법도 없다. 게다가 이렇게 한 눈에 이야기의 흐름을 그림을 보게 되면 작품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더 흥미진진해지게 마련이다.

 

이번에 만난 <소설 & 지도>라는 독특한 책은 바로 그러한 독자들의 바램을 놀라운 상상력으로 구현해내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앤드루 더그라프와 편집자이자 에세인 작가인 대니얼 하먼이 함께한 이 책은 소설과 희곡, 19편의 무대를 지도로 그려낸 작품이다. 셰익스피어부터 마크 트웨인, 제인 오스틴, 프란츠 카프카, 어슐러 K. 르 귄까지. 19명의 작가, 19편의 이야기들이 정교하고도 환상적인 지도로 재탄생했다. 그래서 이 책은 이야기 속 허구의 장소를 마치 현실 속 그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놀라운 마법을 보여 준다.

이 마을에는 이름이 없다. 위치는 지도 위에 표시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양한 인물의 궤적은 최후의 비극과 연관 지어야만 이해할 수 잇다. 궤적은 모두 하나의 검은 점으로 모여든다. 마을에는 규칙이 있고, 규칙을 따르는 것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며 늘 해오던 일이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의 본질이 그런 까닭에 검은 점을 축출한다면 공동체는 결합력을 잃고 사라지고 말리라.    - 셜리 잭슨 <제비뽑기> p.93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그린 지도는 정말로 존재해온 곳이기에 지리적 풍경은 거의 동일하지만, 현실적 요소와 상상이 뒤섞여 있어 더욱 흥미롭다. 올림포스 산과 트로이의 목마가 있는 장소와 더불어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와 마녀 세이런이 사는 섬 같은 가상의 공간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은 주인공들이 사는 엘시노어 성을 전체 5막인 이야기에 맞게 다섯 가지 지도로 표현하고 있다. 각각의 인물들의 행동에 따른 동선을 다른 색깔로 표현한 이 지도는 놀랍게도 햄릿의 광기가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성의 다른 인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도 <로빈슨 크루소>의 섬, <모비딕>의 포경선과 고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쿠르지와 유령이 시간여행을 떠나게 되는 여정이 보여지는 마을의 전경 등 색다르고, 아름다운 지도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 의 육각형 전시실이 무한히 이어져 있는 엄청난 도서관 지도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도서관 형태의 우주를 꿈꾸었던 보르헤스의 상상력을 공간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이 책은 하나의 작품을 한 장의 그림으로 압축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작품 속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 파노라마 그림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픽션에서 현실로, 현실에서 환상으로.. 소설 속 세계를 지도로 재창조한 이 책은 '공감각적 소설 읽기'를 경험하게 만들어 준다.

이 책에 실린 지도에는 플롯의 구심점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문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언어가 이미지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의도대로 이 지도가 작품 속으로 안내하는 초대장의 역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닌가 싶다. 소설을 만나는 조금 색다르고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는 황홀한 체험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어머니 이야기 세트 - 전4권
김은성 지음 / 애니북스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엄마들은 종종 딸에게 말한다. 나처럼 살지 말라고. 또 엄마들은 종종 쓸쓸하게 체념하듯 중얼거린다. 이것도 다 내 팔자지. 그리고 엄마들은 삶이 유난히 고단하고 팍팍한 날이면 또 말한다. 엄마는 괜찮다고.

 

올해로 일흔 둘이 되신 나의 엄마는 가족들이 모두 뜯어 말리는 결혼을 했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보다 나이가 열 여섯 살 많았고, 이혼 후 딸 둘을 키우고 있었다. 게다가 오랜 시간 직업 군인으로 일을 하신 탓에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셨고, 명문대를 졸업하시고 남다른 프라이드가 있었던 분이라 비슷한 수준이 아니면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엄마는 사람 좋아하고, 이웃이든 친지든 뭔가 퍼주는 걸 즐겨 했고, 남편의 강압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을 다 받아주면서도 절대 기죽지 않고 할말 다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죽고 못사는 사랑에 빠져 결혼한 것도 아니었고, 선을 보고 의례적인 몇 번의 만남 후 결혼을 한 것이니 그 이후의 시간들은 커다란 반전 없이 누구나 예상할 법한 스토리로 이어진다.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시절이라 아들을 낳지 못한 며느리는 구박덩어리였고, 덩달아 딸이라는 이유로 나와 내 동생도 할머니의 눈치만 보며 단 한 번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

엄마는 대체 그런 결혼을 왜 했던 것일까. 한때 황혼 이혼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도 있었는데, 엄마는 아빠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곁에 계셨다. 대체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제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바보 같았고, 미련했던 엄마의 삶에 여전히 화가 난다. 가끔 엄마가 지난 시절을 후회하는 투로 말을 하거나, 당시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말을 꺼내면, 나는 더 듣지도 않고 말했다. 어쨌든 엄마가 선택한 거니까, 그건 엄마가 책임져야지. 엄마 인생이니까. 생각해 보면 나는 늘 이런 딸이었다. 엄마가 여자로, 아내로, 사람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려고 할 때면 차가워졌다. 엄마의 슬픔, 엄마의 서러움, 엄마의 회한 이런 것들을 감당하기가 무서워 선을 긋고, 뒤 돌아섰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나는 이렇게 나이를 먹고도 왜 여전히 이렇게 철부지 딸인 걸까.

 

리뷰를 쓰면서 책의 내용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로 왜 이렇게 긴 서두를 시작했느냐 하면,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엄마의 이야기게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은 것이 너무도 미안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인생을 조금 더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고, 속상했다. 바로 김은성 작가의 만화 <내 어머니 이야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렇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나면 나의 엄마가 생각나고, 엄마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엄마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좋은 책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계속 독자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책 속 이야기를 통해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의 이야기가 끝이 난 뒤에도, 끊임없이 우리 엄마도 거쳐 왔을 한국의 근 현대 백 년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힘들었던 그 시절을, 여자로,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살아온 나의 엄마를 생각한다.

 

새집에 다시 고양이가 살기 시작한 것처럼 엄마와 나도 다시 힘을 내서 살아보기로 했다. 이제 엄마는 엄마 일, 나는 내 일을 하면 된다. 엄마는 1927년생으로 80년의 삶을 되짚어보고 있고, 나는 그런 엄마를 만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고향은 물장수로 유명한 함경남도 북청이다.

 

마흔에 처음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딸이 꼬박 십 년을 바쳐 그린 어머니의 삶이 바로 전 4권으로 된 만화 <내 어머니 이야기>이다. 저자는 십 년에 걸쳐 어머니의 이야기를 녹취하여 이 만화를 그렸는데, 모든 대사와 내레이션에 구술자인 어머니의 입말을 최대한 살렸다고 한다. 저자의 사십대와 어머니의 팔십대가 오롯하게 담긴 이 책은 사실 절판된 지 3년 만에 이번에 재출간이 되었다. 김영하 작가가 알뜰신잡이라는 방송에서 사라지지 말아야 하는 책으로 강력 추천한 덕분이다. 방송의 힘은 참 대단한 것이, 이렇게 사라진 책을 복간하기도 하고, 나온 지 한참 된 구간을 몇 천부씩 증쇄하게 만들기도 하고, 출간되었을 때는 거의 빛을 보지 못했던 책을 갑작스레 베스트셀러로 만들기도 한다. 나 역시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는 독자였지만, 만화까지 챙겨보는 편은 아니었던 터라 김영하 작가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작품이 세상에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새삼 감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놀라운 작품이 절판되어 세상에서 묻힌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손실이겠는가.

이 책은 일제 강점기의 함경도 북청을 배경으로, 당시의 생활상과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야기이다. 어머니의 유년 시절부터 시작해 원치 않은 혼인과 소소한 집안사 등이 이어지고, 6.25전쟁으로 인해 피난민 시절을 거쳐 70년대 말 서울에 올라온 뒤의 가족사가 현재 대학생이 된 딸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지극히 평범한 개인의 삶 전체를 그리고 있기에, 엄청나게 극적인 사건이나, 화려한 클라이막스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갈등 관계나 놀라운 전개를 보여주는 스토리는 아니다. 하지만 투박한 그림체와 구수하고 맛깔나는 사투리로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한 명 한 명, 개개인의 소소한 일상들이 모여서 거대한 역사가 된다는 것을 놀랍도록 재미있게 들려 주고 있다. 교과서에나 봤던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읽어도, 생생하게 와 닿고 실재한 삶으로 체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견디고 살아내 우리를 키워 낸 세상 모든 엄마들의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10년대에서 시작해, 40년대, 50년대를 거쳐 7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 중 가장 격동의 시기를 통과하는 매우 평범한 한 여성의 생애를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김영하 작가가 말한 것처럼, 세상에는 사라져서는 안 되는 책들이 있다. 이러한 책을 만나게 해 준 작가님의 추천이 눈물 나게 고마운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